박흥보전 - 신재효본
우리 나라가 군자의 나라요, 예의의 땅이라. 작은 열읍에도 충신이 있고, 일곱살 어린이도 효제를 일삼으니, 무슨 불량한 사람이 있을까마는, 요임금 때에도 도척이란 큰 도둑이 있었으며, 순임금 세상에도 네 사람의 악인이 있었으니, 아마도 한 가지 나쁜 기운은 어찌 할 수가 있겠는가.
충청, 전라, 경상 3도 어름에 사는 박가 두 사람이 있었으니, 놀보는 형이요 흥보는 아우인데, 같은 부모 소생이지만, 성정이 아주 달라 서로 떨어져 관계가 멀었다. 사람마다 오장육부였지만 놀보는 오장칠부인 것이 심술보 하나가 왼편 갈비 밑에 병부주머니 찬 듯하여 밖에서 보아도 알기 쉽게 달려 있어, 심사가 말할 것 없고, 일망무제로 나오는데 똑 이렇게 나오는 것이었다.
본명방에 벌목을 하고, 잠사각에 집짓기며, 오귀방에 이사를 권하고, 삼재든 데 혼인하며, 동내 주산 팔아먹고, 남의 선산에 묘지쓰기, 길 가는 과객 양반 재울 듯이 붙들어다 해가 지면 내쫓고, 일년품팔이 외상 사경(私耕)에 농사지어 추수하면 옷을 벗겨 내쫓고, 초상난 데서 노래하고, 역신든 데서 개를 잡고, 남의 노적에 불지르고, 가뭄 농사 물꼬 빼기, 불 붙는 데 부채질하기, 야장할 제 웨장하기, 혼인발에 바람 넣고, 시앗 싸움에 덩달아 싸우기, 길 가운데 허방 놓고, 외상 술값에 억지쓰기, 전동다리에 딴죽치고, 소경 의복에 똥 칠하기, 배 앓는 사람에게 살구 주고, 잠든 사람 뜸질하기, 내달리는 사람에게 발 내치고, 곱사등이 잦혀 놓기, 열리는 호박 덩쿨을 끊고, 패는 곡식은 모가지 뽑기, 술 먹으면 주정부리고 욕설 퍼부으며, 장터에서 억지로 물건 팔기, 좋은 망건은 편자 끊고, 새 갓 보면 땀대 떼기, 가난한 양반 보면 관을 찢고, 걸인 보면 자루 찢기, 상인 잡고 춤추기와 여승 보면 겁탈하기, 새 초분에 불지르고, 소대상의제청 치우기, 애 밴 여자의 배통 차고, 우는 아이에게 똥 먹이기, 먼 길손의 노비 도적, 급주군 잡고 실랑이질, 관차사의 전령 도적, 진영 장병의 막대 뺏기, 지관 보면 패철 뺏고, 의원 보면 침 도적질, 물동이 인 여자에게 입 맞추고, 상여꾼에게 형문치기, 만만한 놈 뺨치기와 고단한 놈 험담하기, 채소밭에 물똥 싸고, 수박밭에 외손질과 소목장인 대패 뺏고, 초라니패 탈짐 도적, 옹기짐에 작대기 차고, 장독간에 돌 던지기, 소매치기 벌금돈과 잔 도적의 끝돈먹기와 다담상에 흙덩이질, 이장할 때 뼈 감추기, 어린 아이 불알을 발라 말총으로 호아매고, 약한 노인 엎어뜨리고 마른 항문 비역하기, 제주 병에 개똥 넣고, 사주병에 비상 넣기, 곡식밭에 우마 몰고, 부형벌 사람과 벗질하기, 귀먹은 이 욕하기와 소리할 때 잔말하기, 날이 새면 행악질, 밤이 들면 도적질을 평생에 일삼으니, 제 어미 붙을 놈이 삼강을 아나, 오륜을 아나. 굳기가 돌덩이요, 욕심이 족제비라. 네 모난 소롯으로 이마를 비비어도 진물 한점 날 리 없고, 대장장이 불집게로 불알을 꽉 집어도 눈도 아니 깜짝이는 사람이었다.
흥보의 마음씨는 저의 형과 아주 달라,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존경하며, 이웃간에 화목하고, 친구에게 믿음이 있어, 굶어서죽을 사람 먹던 밥을 덜어주고, 얼어서 병든 사람 입었던 옷 벗어주기, 노인이 짊어진 짐 자청하여 져다 주고, 장마 때 큰 물가에 삯 안 받고 건네주기, 남의 집에 불이 나면 세간살이 지켜주고, 길에 보물이 빠졌으면 지켜 섰다 임자 주기, 청산에서 백골을 보면 깊이파고 묻어주며, 수절 과부 보쌈하면 쫓아가서 빼어 놓기, 어진 사람 모함하면 대신 나서서 변명하고, 불쌍한 사람의 횡액을 보면 달려들어 구원하기, 길 잃은 어린 아이는 저의 부모 찾아주고, 주막에 병든 사람 본집에 기별 전하기, 막 깨어난 벌레를 죽이지 않고 자라는 초목을 꺾지 않으며, 남의 일만 하느라고 한 푼 돈도 벌지 못 하니 놀보가 오죽 미워하겠는가.
하루는 놀보가 흥보 불러 하는 말이,
"사람이라 하는 것이 믿는 것이 있으면 아무 일도 안되는 법이다. 너도 나이 장성하여 계집 자식 있는 놈이 사람 생애 어려운 줄을 조금도 모르고서, 나 하나만 바라보고 놀고 먹고 놀고 입는 모양 보기 싫어 못살겠다. 부모의 세간살이가 아무리 많아도 장손의 차지될 것인데, 하물며 세간은 나 혼자 장만하였으니, 네게는 돌아갈 것이 없다. 네 처자를 데리고서 어서 멀리 떠나거라. 만일 지체하였다가는 살육지환이 날 것이니, 어서 급히 나가거라."
하니 가련한 흥보 신세에 지성으로 비는 말이,
"제발 빕니다. 형님 전에 빕니다. 형제는 일신이라, 한 조각을 베어내면 둘 다 병신 될 것이니, 그 수모를 어찌하리. 동생 신세는고사하고, 젊은 아내와 어린 자식을 뉘 집에 가서 의탁하며, 무엇을 먹여 살리겠어요. 당나라 장공예는 아홉 세대가 함께 살았다 하는데, 아우 하나 있는 것을 나가라 하십니까. 할미새는 짐승이지만 벗 사이의 정이 두텁고, 상체는 한갖 꽃이지만 즐겁게 사귀는 깊은 정을 품었으니 형님 어찌 모르십니까. 오륜의 뜻을 생각하여 십분 통촉하십시오."
놀보가 분이 나서 그런 야단이 없었다.
"아버님 계실적에 나는 생 일만 시키고서 작은 아들 사랑스럽다고 글 공부 시키더니, 너 매우 유식하구나. 당태종은 성주였지만 천하를 다투어서 그 동생을 죽였으며, 조비는 영웅이나 재주를 시기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나같은 초야 농부가 우애지정을 알겠느냐."
하고 구박하여 문 밖으로 쫓아내니, 흥보 신세 가련하다. 입도 뻥끗 못 하고서 빈 손으로 쫓겨나니 광대한 이 천지에 집없는 손이 되었구나.
불쌍한 흥보댁이 부자집 며느리로 먼 길 걸어보았겠나. 어린 자식 업고 안고 울며 불며 따라갈 때, 아무리 시장하나 밥 줄 사람 어디 있으며, 밤이 점점 깊어간들 잠잘 집이 어디 있나. 저물도록 빡빡 굶고 풀밭에서 자고 나니 죽을 밖에 수가 없어 염치가 차차 없어 갔다. 이곳 저곳 빌어먹어 한두 달 지내가니 발바닥이 딴딴하여 부르트는 일이 아예 없고, 낯가죽이 두터워서 부끄러움이 하나도 없어졌다. 1년 2년 넘어가니 빌어먹는 수가 터져서 흥보는 읍내 나가면 객사에나 사정에나 자리를 떡 버티고, 외촌을 갈 양이면 물방아집이든지 당산 정자 밑에든지 사처를 정하고서, 어린 것을 옆에 놓고 긴 담뱃대 붙여 물고 솥을 닦아내는 솥솔을 매든지, 또아리를 곁든지, 냇가 방축 가까우면 낚시질 앉아 할 때, 흥보의 마누라는 어린 아이 등에 붙여 새끼로 꽉 동이고, 바가지에 밥을 빌고 호박잎에 건건이를 얻어 허위허위 찾아오면, 염치없는 흥보에 소견에 가 장 티 내느라고 가속이 더디왔다, 짚었던 지팡이로 매질도 하여보고, 입에 맞는 반찬 없다고 앉았던 물방아집 불도 놓아보려 하고, 별꼴을 매양 부렸다.
하루는 이 식구가 양다리 쭉늘어 앉아 헌 옷의 이를 잡으며, 흥보가 하는 말이,
"우리 신세가 이렇게 되어 이왕 빌어먹을 테면 전곡이 많은 데로 가 볼 밖에 수가 없으니 포구 도방을 찾아가세."
일 원산, 이 강경, 삼 포주, 사 법성리, 낙안 부원다리, 부안 줄내, 근방을 다 찾아다녀 보니 비린내에 속 뒤집혀 암만해도 살 수 없다. 산중으로 다녀 볼까, 우복동 수인섬과 청학동 백학동 두류산 속리산 순창 복흥 태인 산내, 한다는 좋은 데를 다 찾아다녀 봐도 소금 없어 살 수가 없다. 고향 근처 도로 와서 한 곳에 이르니 촌 이름은 복덕이요 인심이 순후한데, 빈 집 한 칸 서 있어서 잠시 주접 살아보니, 집꼴이 말이 아니어서, 집 마루에 이슬 오면 천정에 큰 빗방울, 부엌에 불을 때면 방안은 굴뚝이요, 흙 떨어진 욋대 구멍에 바람은 살 쏘듯 했다. 틀만 남은 헌 문짝에 공석으로 창호하고, 방에 반듯 드러누워 천정을 올려다 보면 개천도를 부친 듯이 이십팔수 세어보고, 일하고 곤한 잠에 기지개를 불끈 켜면 상투는 허물없이 앞 토방으로 쑥 나가고, 발목은 어느 사이에 뒤원에 가 놓였다. 밥을 하도 자주 안하니 아궁이의 풀을 뽑으면 한 마지기 못자리는 넉넉히 할 만했다.
그럭저럭 여러 해에 자식은 더럭더럭 풀풀이 생겨나고, 가난은 버석버석 나날이 늘어가니, 여러 식구 굶어내기가 초상난 집의 개에 비길 만했다.
흥보의 마누라가 견디다 못 견디어 가난 타령으로 섧게 울었다.
"가난이야 가난이야 만고에 있는 가난. 아무리 헤아려도 내 웃수의 가난은 다시 없네. 아주 좁고 찢어지게 가난하여 도정절의 가난하기도 내 집에 비하면 대궐이요, 삼순구식 십년일관이란 정관문의 가난하기도 내게 대면 부자로다. 제나라 오룽중자가 굶주렸으나 오얏은 얻어먹고, 한나라 소중랑은 굶을 때에 방석 털을 삼켰다 하지만, 오얏을 어찌 보며 방석이 어디 있나. 선산을 잘못써서 이러한가. 파묘나 하자 해도 종손이 말릴 것이고, 귀신이 저희 하는 점이나 하자고 해도 쌀 한 줌이 없으니 복채를 낼 수가 있나. 애고애고 서러운지고. 기한이 이러하니 불고염치 절로 되네. 여보시오 아기 아버지, 형님댁에 건너가서 전곡 간에 얻어다가 굶은 자식 살려냅시다."
흥보가 걱정하여,
"형님댁에 건너가서 애절히 사정하여 돈이 되나 쌀이 되나 주시면 좋커니와, 어려운 그 성정에 만일 안 주시고, 호령만 하시면 근래같은 세상 인심에 형님 실덕이 될 터이니, 아니 가는 편이 옳으이."
"주시고 안 주시기는 처분에 계시오니 청하다가 못되며는 한이나 없을테니, 수인사대천명이라고 길을 두고 뫼로 갈까. 되든지 안 되든지 허사 삼아 가보시오."
흥보가 할 수 없어 형의 집으로 건너갈 때, 의관을 한참 차려, 모자 터진 헌 갓에다 철대를 실로 감아 노갓끈을 달아 쓰고, 편자는 좀이 먹고 앞춤에 구역 중중, 관자 띤 헌 망건을 물렛줄로 얽어 쓰고, 깃만 남은 베 중치막 열두 도막 이은 실띠로 시장찮게 졸라 매고, 헐고 헌 고의적삼 살점이 울긋불긋 목만 남은 길버선에 집대님이 별조였다. 구멍 뚫린 나막신을 두 발에 잘잘 끌고, 꼭 얻어올 양으로 큼직한 구럭을 평양 가는 어둥이처럼 관뼈 위에 짊어지고 벌벌 떨며 건너갈 때, 저 혼자 혀를 차며 탄식하여,
"아무리 생각해도 되리란 말이 안 나온다. 모진 목숨 죽지 않고 이 고생을 하는구나."
형의 문 앞에 당도하니 그새 위세가 더 늘어서 가사가 아주 웅장했다. 30여 칸 줄행랑을 일자로 지었는데, 한가운데 솟을 대문이 표연이 날아갈 듯하고, 대문 안에 중문이요 중문 안에 벽문이 늘어섰다. 건장한 종놈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쇠털 벙치 청창의를 입고 문마다 수직하다가 그 중에 늙은 종은 흥보를 알아 보았다. 깜짝 놀라 절을 하며, 손을 잡고 눈물 흘리며,
"서방님 어디 가서 저 모습이 웬일입니까. 수직방에 들어 앉아 몸이나 조금 녹이십시다."
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담배를 붙여 주며,
"서방님이 저리 될 때에야 아씨야 오죽하며, 그새에 아기네는 몇 분이나 더 나시고, 어이하여 저 꼴이 되셨어요? 서방님 나가실 때 우리들 공론말이 군자같은 그 심덕이 어데 가면 못살겠나, 어디를 가도 부자되지. 그럴 줄만 알았더니 세상이 공도 없지요."
혀를 끌끌 차며 화로의 불을 뒤집어 가까이 놓아주니, 흥보가 불 쪼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목 메인 소리로,
"복 없으면 할 수 없데. 아들은 스물 다섯. 아씨 말도 할 말 있나. 내 차리고 온 의복은 게다 대면 장가길이지. 이 식구 스물 일곱, 딱 죽게 되었기에 형님께 말씀드려 뭐 좀 얻어가자 왔네마는 문안일향하시옵고 성정 조금 풀리셨는지."
"문안이야, 그 앞에 가 무슨 병이 얼른하며, 좀체 귀신이나 꼼짝할까. 일생 태평하시옵고, 그 성정 말씀이야 서방님 계실 때보다 몇 배나 더 독하지요. 두 말씀 할 수 있어요. 이번의 제사 때에도 음식 장만도 아니하고, 대전으로 놓았다가 도로 쏟아내옵는데, 지난 달 대감 제사에 놓았던 돈 한 푼이 제상 밑에 빠졌든지 몇 사람이 죽을 뻔했어요. 이번엔 또 의사 나서 싸돈으로 아니 놓고 꿰미채 놓았습죠."
흥보가 방에 앉아 담배 피고 불 쪼이니, 몸이 조금 녹았다가 이 말을 들어보니 등어리가 선듯선듯 찬물을 끼얹고, 가슴이 두근두근 쥐덫이 내려지고, 머리 끝이 쭈뼛쭈뼛하여 하늘로 올라 가서, 온 몸을 벌렁벌렁 떨면서 하는 말이,
"거기 들어가지 말고 바로 가는 수가 옳지. 이럴 줄 미리 알고 아예 아니 오쟀더니, 아씨에게 못 견디어 부득이 왔네 그려."
그 종이 하는 말이,
"이 추위에 저 꼴 하고 예까지 오셨다가 못 얻으면 그만이지, 무슨 탈이 있겠어요. 어서 들어가 보시오."
"전일에 계시던 방, 그저 거기 계신가?"
"아니오. 그 방 옆에 꽃계단을 꾸며 놓고 꽃계단을 앞 굽은 길에 전석이 깔렸으니, 그리 휘도라 가면 외밀이 쌍창 열고, 화류틀 만자영창 양편 거울 붙인 방에 비슥 누워 계시옵니다."
"같이 가서 가르치소."
"아니오. 못하지요. 이런 위태한 일을, 만일 아차 하게 되면 날더러 데려왔다고, 둘이 다 탈이오니 혼자 들어가 보시오."
흥보가 할 수 없어 이를 꽉 아득 물고 팔장을 되게 끼고 죽을판 살판으로 가만가만 자주 걸어, 초당 앞에 이르니, 과연 놀보가 영창문을 반만 열고 검은 담비모피 두루마기 우단 왜단 무겁다고 양색단의를 하고 청모관을 빗겨 쓰고, 색 좋은 백동 오동수복 부산장인 맞춤 담뱃대에 팔장생 별각죽을 기장 길게 맞추어서, 양담배 피워 입에 물고, 안석에 비슥 누웠구나.
흥보가 아주 죽기로 각오하고 툇마루에 올라서서 극진히 절을 하고 떨며 눈물을 흘리며,
"떠나온 지 여러 해인데 기체 안녕하옵신지."
놀보가 한 손으로 안석 짚고 배 앓는 말이 머리 들듯 비슥이 들어보이며 한 어미 배로 나와 함께 커서 장가들고, 자식 낳고 함께 살다 쫓아낸 동생이니, 아무리 오래 되고 형용이 변했다고 모를 리가 있을까마는, 우애없는 사람이라 아주 모르는 체하여,
"뉘신지요?"
흥보는 정말 모르고 묻는 줄로 알았구나. 나가던 연조까지 고하여,
"갑술년에 나간 흥보요."
놀보가 무수히 곱씹으며 의심내어,
"흥보, 흥보, 일년 새경 먼저 받고 모 심을 때 도망한 놈, 그놈은 황보렸다. 쟁기질 보냈더니 소 가지고 도망한 놈, 그놈은 흉보렸다. 흥보, 흥보, 암만해도 기억하지 못하겠소."
흥보가 의사 있는 사람이면 수작이 이러하니 무슨 일이 될 것인가, 썩 일어서 나왔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인데 저 농판 순박한 마음에 참 모르고 그러하니, 자세히 이르면 무엇을 줄줄 알고, 본사를다 고하여,
"동부 동모 친형제로 이름자 항렬하여 형님 함자 놀 자(字) 보 자(字) 아우 이름 흥보라 하는 것을 그렇게 잊으셨소?"
놀보가 생각하니 다시 의뭉을 피우자 해도 흥보의 하는 말이 밤 까놓듯 하였으니, 의뭉집이 없어졌구나. 맞설 밖에 수가 없어,
"그래서 동부동모나 이부이모나 친형제나 때린 형제나 어찌 왔나?"
원판 미련키는 흥보같은 사람이 없어 얻으러 왔단 말을 그 말끝에 할 것인가. 엔간한 제 구변으로 놀보 감동시키려고, 목소리를 섧게 하 고 눈물을 훌쩍이며 고픈 배를 틀어쥐고 애절하게 빌어본다.
"형님 나를 내보내기는 미워함이 아니시라, 형님 덕에 유의유식하는 사람될 수 없었으니 각 살이로 고생하면 행여나 사람될까 생각하여 하셨으니, 그 뜻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놀보가 저를 추켜주는 말은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 말에는 썩 대답하기를,
"아무려믄."
"형님댁을 떠나을 때 부부가 손목을 서로 잡고 언약을 하옵기를, 밤낮으로 놀지 말고 착실히 품을 팔아, 돈 관이나 모으거든 흰떡 치고 찰떡 치고 영계 삶아 우에 얹어 내 등에 짊어지고, 찹쌀 청주 웃국 질러 병에 넣어 잔에 들고, 형님댁에 둘이 가서 형님 부부 잡숩는 것을 기어이 보고 오세."
놀보가 음식 말을 듣더니 침을 삼키며 추어 말하기를,
"그렇지."
"단단히 약속하였더니, 어찌 그리 복이 없어 밤낮으로 벌어도 돈 한 푼을 못 모으고, 원치 않는 자식들은 아들이 스물 다섯."
놀보가 뒤로 물러나 앉으며 군소리하기를,
"박살할 놈, 그 노룻을 하여도 밤이면 대고 파대니, 다른 일 할 틈 이 있어야지. 계집년 생긴 것이 눈이 벌써 음녀거든."
"식구가 이러하니 아무런들 할 수 있어야지요. 빌어도 하도 먹으니 다시는 빌 데 없고, 굶은지도 꽤 오래니 더 굶으면 죽겠기에, 형님 찾아 왔사오니 전곡 간에 조금만 주시면 스물 일곱 죽는 목숨 제 나라 여상이의 일단사요, 학철에 일두수라니 적선을 해주세요."
두 손을 비비면서 꿇어 엎드려 슬피 우니, 놀보의 생각에는,
'저놈의 생긴 것이 빌어먹기에 투가 나서 달래서는 안 갈테고, 주어서는 또 올테니, 죽으면 굶어 죽지 맞아 죽을 생각은 없이 하는 것이 옳다.'
하고, 부자집 바람벽에 도적 막는다고, 철퇴 철편 마상도며 단단한 몽둥이를 오죽 많이 걸었겠나. 그 중에 단단하고 손잡이 좋은 몽둥이 하나를 내어 손에 들고, 엎어져 우는 볼기짝을 에둘러쳐 딱 때리고 추상같이 호령했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제 정한 복이 각기 있어, 잘난 놈은 부자되고, 못난 놈은 가난한 법이니 내가 이리 잘 사는 것이 네 복을 뺏었느냐. 누구에게다가 떼 쓰자고 이 흉년에 곡식 주쇼! 목 안으로 소리하며 눈물 방을 흩뿌리면 네 잔꾀에 내가 속을 줄 아느냐. 조금만 지체했다가는 잔뼈도 찾지 못 할테니 속속 출문 어서가라."
몽둥이를 또 들러메니 불쌍한 저 흥보가 제 형의 성정을 아는구나. 눈물 씻고 절을 하며,
"정말 잘못 하였으니 너무 노여워 마옵시고 평안히 계옵소서. 동생은 가옵니다."
하직하고 나올 때에 놀보 아내가 거지에게 밥을 싸주었다. 진가리 퍼서 주고 공알답인 한다 해도 모두 거짓말이고, 이 년의 마음씨는 놀보보다 더 독하여 낭자하고 긴 대 물고 안 중문에 비껴서서 시종을 구경하다가 흥보가 가는 것을 보고 제 서방을 나무래며,
"저러한 억지꾼놈을 단단히 쳐 주어야 다시는 안 올 텐데, 어떻게 때렸관대 여상으로 걸어가네. 제 계집은 잘 잡죄지. 다리칼 공알주먹, 동생은 우애하여 사정을 보았구만."
흥보가 형의 집에 전곡 얻으러 왔다가 몽둥이만 잔뜩 타고 비틀걸음으로 건너간다.
이때에 흥보 아내는, 여러 날 굶은 가장을 형의 집에 보내고서 전 곡 간에 얻어오면 굶은 자식 먹일 줄로 알고 동리 어구에 나가서 기다린다. 스물 다섯 되는 자식, 다른 사람 자식 낳듯 한 배에 하나 낳아, 삼사 세 된 연후에 낳고 낳고 하여서야 사십이 못 다 되어 어찌 그리 많이 낳겠는가. 한 해에 한 배씩, 한 배에 두셋씩 대고 낳아 놓았구나. 그리해도 아이들은 칠칠일을 지나면 안기도 하여 보고, 백일이 지나며는 업기도 하여 보고, 첫돌이 지나면 손 잡고 걸어보고, 서너 해 지나면 의복 입고 다녔어야 다리에 골이 오르고 몸이 활발할 터인데, 이 집 자식 기르는 법은 멍석을 겨를 적에 세 줄로 구멍을 내어, 한 줄에 열 구멍씩 첫 구멍 조그맣고 차차 구멍 크게 했다. 한 배에 낳은 자식 둘이 되나 셋이 되나 앉혀 보아 앉으면 첫 구멍에 목을 넣고, 하루 몇 때씩을 암죽만 떠 넣으면 불쌍한 이것들이 울어도 앉아 울고, 자도 앉아 자고, 똥 오줌 마려우면 멍석쓴 채로 앉아 누워, 세상에 난 연후에 실오라기 하나라도 몸에 걸쳐본 일이 없고, 한번도 문턱 밖에 발 디디어 본 일이 없고, 다른 사람 얼굴 보아 소리 들어본 일이 없고, 그저 앉아 큰 것이라. 때 묻은 야윈 낯이 터럭이 거칠거칠 동지 섣달 강아지가 아궁이에 자고난 듯, 멍석 쓴 채 세고 보면 빼빼 마른 몸둥이가 짱둥이를 엮어놓은 듯, 못 먹고 앉아 크니, 워낙 무르게 되어 큰 놈들은 스무 살씩, 작은 놈들은 십칠팔 세, 남의 자식 같으면 농사하네 나무하네 한창들 벌련마는, 원 늦되어서 부르는 게 어메, 아비. 음식 이름 아는 것이 밥 뿐이로구나. 다른 음식 알자 한들 세상에 난 연후에 먹기는 고사하고 보거나 듣거나 하였어야지. 밥 갖다 줄 때가 조금만 지나면 뭇놈이 각청으로,
"어메 밥,어메 밥."
하는 소리가 비 올 때 방죽의 개구리 소리도 같고, 석양 하늘에 떼매미 소리도 같다. 언제라도 밥 들고 들어가도록,
"어메 밥,어메 밥."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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