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현대역 50선

박흥보전_신재효본_03

pitagy 2023. 3. 26.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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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굶은 저 흥보가 헛 수인사 한 번 하여,

"저러하신 선동이 날같은 사람 보려 하고 그 먼 데서 오셨다가 아무리 소금밥이나 점심 요기해야 하지."

동자가 웃고 대답하기를,

"세상 사람 아니기에 시장하면 구전단, 목 마르면 감로수, 연화식을 못 하오니 염려치 마옵소서."

하고 인홀불견 간데 없다.

흥보가 생각하기를 허술한 집구석에서 선약을 흑 잃을까, 조그마한 오장이에 모두 넣어 꽉 동여서 움막방 들보 위에 씨나락 모양으로 단단이 얹었구나. 동자를 보낸 후에,

"어허, 괴이하다."

박짝 속을 또 굽어보니 목물들이 놓였는데, 하나는 반닫이 농만하고, 하나는 벼루집만한데 주홍 왜칠 곱게 하고, 거북 자물쇠를 단단히 채고서, 초록 당사 벌매듭에 열쇠 달아 옆에 걸고 둘 모두뚜껑 위에 황금 정자 쓰였는데, '박흥보 개탁'이라. 흥보 보고 장담하기를,

"내가 비록 산중에 사나 이름은 멀리 났지. 봉래산 선동들도 내 이름을 부르더니 목물 위에 또 썼구나."

둘 다 열고 보니 하나는 쌀이 가득, 하나는 돈이 가득. 부어내어 되고 세니 동서방 상생수로 쌀은 서 말 여덟 되, 돈은 넉 냥 아홉 돈, 온 집안이 대희하여 그 쌀로 밥을 짓고, 그 돈으로 반찬을 사서 바로 먹기로 드는데, 흥보의 마누라가 살림살이 약게 하나 양식 두고 먹은 일이 있나. 부자아씨 같으면 식구가 스물 일곱, 모두 칠홉 낼지라도 이칠이 십사, 칠칠은 사십구, 말 여덟 되 구홉이니, 채워 두 말 하였으면 오죽 푼푼하련마는, 평생 양식 부족하여 생긴대로 다 먹는다. 부부가 품 판 삯을 양식으로 받아 오나 돈으로 받아 오나, 한 돈어치 팔아 오나 두 돈어치 서 돈어치 판대로 하여도 모자라기만 하였기로, 서 말 여덟 되를 생긴 대로 다 할 적에 솥이 적어 할 수 있나. 쇠물솥 그 중 큰 집 찾아 가서 밥을 짓고, 넉 냥 아홉 돈을 쇠고기를 모두 사서 반찬을 하려 할 때, 식칼 도마가 어디 있나.

여러 자식놈들이 고기를 붙들고서 낫으로 자를 적에 고기 결을 알 수 있나. 가로 잘라 놓은 모양 서까래 머리 잘라 놓은 듯, 기둥밑 잘라 놓은 듯, 건개와 양념들도 별로 수가 많지 않아, 소금 뿌리고 맹물 쳐서 토정에 삶아 내고, 그릇 없어 밥 푸겠나 씻지도 않은 쇠죽통에 밥 두 통을 퍼다 놓고, 숱가락은 근본 없고 있더라도 찾겠는가, 여러 해 물기 안 한 손물통 가에 늘어 앉아 서로 주워 먹을적에, 이 여러 자식들이 노상 밥이 부족하여 서로 뺏어 먹었구나. 그리 많은 밥이지만 큰 놈 입에 넣는 것을 작은 놈이 뺏어 훔쳐 큰놈도 뺏기고, 서로 집어 먹었으면 싸움 아니 하련만, 악을 쓰며 주먹 쥐어 작은 놈 볼통이를 이가 빠지게 찧으면서, 개 아들놈 쇠 아들놈, 밥통이 엎어지고 살벌이 일어나되, 무지한 저 흥보는 밥 먹기에 윤리도 잊어버려 자식 몇 놈 뒈져도 살릴 생각 아예 않고, 그 뜨거운 밥인데도 두 손으로 서로 쥐어서 쭉방을 놀리는 식으로, 크나큰 밥덩이가 손에서 떨어지면 목구멍을 바로 넘어, 턱도 별로 안 놀 리고 어깨춤 눈 번득여, 거진 한 말어치 처치를 한 연후에, 왼편 팔 땅에 짚고 두 다리 쭉 뻗치고 오른편 손목으로 배가죽을 문지르며, 밥더러 농담하기로 들어,

"여봐라 밥아, 내가 하도 시장키에 너를 조금 먹었으나, 네 소위를 생각하면 대면할 것 못되지. 세상 인심이 간사하여 세력을 따른다 하지만 너같이 심히 하랴. 세도집과 부자집만 기어이 찾아 가서 먹다 먹다 못다 먹어, 개를 주며 돼지를 주며, 학 두루미 떼 거위를 모두 다 먹이고도, 그리해도 많이 남아 쉬네 썩네 야단하며, 나와는 무슨 원수 있어 사흘 나흘 예상 굶어 뱃가죽이 등에 붙고 갈빗대가 따로 나서, 두 눈이 캄캄하고 두 귀가 먹먹하여, 누웠다 일어나면 정신이 어질어질, 앉았다 일어서면 다리가 벌렁벌렁, 말라 죽게 되었어도 찾는 일이 전혀 없고 냄새도 못 맡게 하니, 그런 도리가 있단 말인가 에라, 이 괴이한 것 그런 법이 없느니라."

아주 한참 준책하더니 도로 슬쩍 달랜다.

"내가 그리한다고 노여워 아니 오려느냐. 어여뻐서 한 말이지 미워 한 말이 아니로다. 친구가 조만없어 정지후박 매였으니 어찌 서로 이리 늦게 만났는가, 원하기는 떨어지지 말고 지내보세. 아겨 아겨 내 밥이야. 아겨 아겨 내 밥이야. 옥을 주고 바꿀소냐, 금을 주고 바꿀소냐, 아겨 아겨 내 밥이야."

밥이 더럭더럭 오게 새 정을 붙이려고 이런 야단 없었구나. 밥하고 수작할 때 흥보의 열일곱째 아들놈이 장난을 하느라고 쌀궤를 열어 보고 깜짝 놀라 아비 불러,

"애겨, 아뷔 이것 보오, 이 궤속에 쌀 또 있네."

흥보가 의심하여,

"그 말이 웬 말이냐? 돈 든 궤를 또 보아라."

"애겨, 돈도 또 들었소."

"어허, 그것 참으로 좋다."

그 많은 자식들이 팔을 바꾸어 종일을 부어내어도 웬 전곡이 어림짐작도 없다. 자식들은 그 노룻을 하라 하고 뱃심이 든든할 때, 둘째 통을 또 켜는데 늘상 굶던 흥보 신세 뜻밖에 밥 보더니, 아주 밥에 골몰하여 톱질하는 선소리를 밥으로 메기었다.

"어이여라 톱질이야. 좋을씨고, 좋을씨고. 밥 먹으니 좋을씨고. 수인씨의 교인화식 날 위하여 가르쳤네."

"어기여라 톱질이야."

"강구노인 함포고복 나만치나 먹었던가. 엽피남묘 전준지희 나만치나 즐기던가."

"어기여라 톱질이야."

"만고에 영웅들도 밥 없으면 살 수 있나. 오자서도 도망할 제 오시에 걸식하고, 한신이 궁곤할 제 표모에게 기식이라."

"어기여라, 톱질이야."

"진문공 전간득식, 한광무 호타맥반, 중한 것이 밥 뿐이라."

"어기여라 톱질이야."

"이 박통을 또 타거든 은금보패 내사 싫어, 더럭더럭 밥 나오소."

슬근 슬근 탁 타 놓으니 온갖 보물 다 나온다.

비단으로 볼작시면 천문일사황금방 번듯 돋아 일광단, 능도중천만국명, 산하영리 월광단, 평치수토 하우공덕, 구주토산 공단, 금성옥진 높은 도덕 공부자의 대단, 진시황 안 무섭네 입이 바로 모초단, 남궁연 대풍가의 금도천지 한단, 팔년간과 지은 죄로 조공 바치던 왜단, 훈금어 삼군무늬 노돌십진 영초단, 나는 짐승 우단, 기는짐승 모단, 쥐털 모아 짜내니 불에 씻는 화한단, 일조 낭군 이별 후 에 숙폐공방 상사단, 계수나무 꺾었으니 낙수청운의 장원주, 가련금야 숙창가 옥빈홍안 가기주, 팽조와 동방삭이 오래 사는 수주, 만동묘 대보단에 만세불망 명주, 만경창파 바람결에 번듯번듯 낭릉이며, 삼월방춘 좋을씨고. 숭이숭이 화릉, 성자도 좋을씨고. 세세 초장수 항라, 황국 단풍 구경 가세 소소금풍 추라, 천간 열을 세어보니 그중 거수 갑사, 남월 북호를 머다 마소 주먹 쥐고 뒤쥐사, 만물지리무궁하니 천지대덕 생초, 상풍구월 축장포에 백곡등풍 숙초, 뭉게뭉게 구름무늬, 두리두리 대접무늬, 이견대인 용무늬며, 낙서 짓던 거북무의요, 한수 춘색 포도무의,용산축신 국화무늬, 팔작팔작 새발 무늬, 투덕투덕 말굽무늬, 북포저포황저포세목중목상목이며, 마포문포 갈포 등물 꾸역꾸역 다 나오고, 온갓 보패 다 나온다.

금패 호박 밀화며, 산호진주청강석유리진옥수만호대모서각고래수염사향용뇌우황이며, 용주한충이궁전이 꾸역꾸역 다 나오고 온갓 쇠가 다 나온다. 황금적금백동이며, 오동주석놋쇠며, 유납구리말근짐생동무쇠시우쇠. 안방 세간 볼짝시면 삼층 이층 외층장, 오흡삼흡 자드리 상자, 지농목농자개 함농두지장앞닫이흡합경대 쌍룡 그린 빗접고비, 바느질 상자반닫이선반횃대장목비큰 병풍소병풍 온갓 그림 황홀하고, 핫이불누비이불 각색 비단 좋을씨고. 화문 보료 우단 요와 녹전처네 원앙침을 한데 모두 모아 놓고, 왜단 보로 덮었으며, 왕골 세석 쌍봉화문 홍수주로 꾸몄으며, 지도서로 꾸민 족자, 산호구에 거는 주렴, 방장휘장 모기장과 순금 반상천은반상놋쇠반상 화기반상 시저 주걱 국자며, 밥소래 놋동이 양푼 유할 탕기 쟁반 열구자 전골탄과 노기 남비 대화로며, 대양 요강놋광명정촛대 함께 놓았으며, 사랑 세간이 다 나왔다.

문갑 책상 왜각계수리 필연 퇴침 찬합 등물, 사서삼경 백가어를 가득가득 담은 책장, 오음 육률 묘한 재미 가지가지 풍류 기계, 흑각장궁 유엽전을 궁대 전통에 각기 넣고, 조총 철편 등채 환도 호반 기계가 좋구나. 금분에 매화 피고 옥황에 붕어 떴다. 요지반도 동정귤을 대모접시에 담아 놓고, 감로수 천일주를 유리병에 넣었으며, 당판책 보아가다 안경 벗어 거기 놓고, 귤중선 두던 판에 바둑 그저 벌였구나. 풍로에 얹은 차관 불엔 내가 아직 일어나고, 필통 옆에 노인 부채는 횐 깃이 조촐하다.

질요강 침 타구와 담배 서랍 재떨이며, 오동 빨주리, 천은 수복 호박통, 각색 연통, 수락 화락 별각죽에 맵시있게 맞추어서 댓 쌈이나 놓았으며, 부엌 세간, 헛간 기물, 농사 연장, 길쌈기계, 가지가지다 나온다. 밥솥국솥대철이며, 가마두멍쇠소댕개수구유살강발과 물항아리 뒤웅박이며, 소래시루항아리소반모반채반이며, 대소쿠리 나무 함지 나무 함박 솥솔조리쪽박이며, 사기 그릇사푼때기재고무래부지깽이부지땅부엌비며, 공석멍석맷방석짚소쿠리멱서리며, 삿갓뉘역 접사리장기따비써레발판쟁이가래호미살포지게도끼낫 자루며, 벼훑이갈퀴도리깨물레돌꼇씨아베틀 따른 각색 기계, 빨래 방망이 다듬잇돌흥두깨 방망이며, 심지어 됫간가래 다른 나무 무겁다고 오동으로 정히 깎아 자주칠 곱게 하여 꾸역꾸역 다 나오니, 이러한 많은 기물 방 좁아 놀 수 없고, 뜰 좁아 쌀 수 없어, 스물 다섯 자식 중에 둘은 어려 못 시키고, 스물 세 명 데리고서 크나큰 동학에다 비단 따로 포목 따로 철물 따로 목물 따로 보물 따로 기명 따로 환부곡식 다발 짓듯 각기 각기 쌓아 놓으니, 적막한 이산중이 불시에 종로되어, 육주비전 공상전과 마상전 박물판과 똑같이 되 었구나.

흥보 아내가 그 안목에 전후 하나나 본 것이 있나. 그래도 가장네는 서울도 갔다 오고, 병영도 다녀오고, 읍내 장에 다녔으니 매우 박람한 줄 알고, 청옥단 통허리를 집어 들고 하는 말이,

"애겨, 그것 장히 좋소. 무명보단 광도 넓으이. 이렇게 긴 바디를 어디서 얻었으며, 짜던 여인네튼 팔뚝도 길던가 봐. 이 편으로 북 던지고 이 편에서 제가 받아, 물은 우리 치마물, 청동인지 쪽물인지 청물이 채가 더 곱거든, 짜 가지고 들였을텐데 반들반들한 데하고 어릉어릉한 데하고 빛이 어찌 같잖으니."

그 껄껄한 두 손으로 비단 무늬를 만지니 오죽이나 붙겠는가.

"애겨, 그것 이상하다. 손가락 아니 놓네."

흥보가 견문이 있어서 수가 터진 사람이면,

"선전의 시정들도 비단 짤 줄 모른다네, 거 어찌 알 것인가."

쉽게 대답하련마는 여편네에게 졸렬하게 비칠까하여 본 것처럼 대답하기를,

"비단 짜는 여인네는 팔뚝이 훨씬 길지. 그렇기에 중국서는 며느리 선볼 적에 팔뚝을 먼저 보지. 물은 그게 청동물 청이 곱고 안 곱기는 잿물 넣기에 매였지. 웅얼웅얼한 것들은 물들여 가지고서 갖풀로 붙였기로 손가락이 딱딱 붙지."

흥보댁이 팍 속아서,

"애겨, 그렇거든 우리 부부 평생 한이 의복 없어 한하다가 먼저 통에 밥 나와서 양대로 먹었더니, 다행히 이 통에서 옷감이 하도 많으니 각기 눈에 드는 대로 옷 한 벌씩 하여 입세."

"내 소견도 그러하네. 언제 바빠 옷 짓겠나. 우리의 식구대로 한 필씩 가지고서 위에서 아래까지 우선 휘감아 보세."

"그리할 일이오. 무슨 비단 가지고서 당신부터 감으시오."

"우리가 넉넉했더면 큰 자식을 성취시켜 전가를 벌써 하고, 건방으로 갈 터이니, 제 방위색 찾아 혹공단을 감으려네."

"나는 무슨 색을 감을까?"

"자네는 곤방 차지 횐 비단을 감을테지."

"옛소. 백여우 같게, 붉은 비단 감을라네."

"딸이 없으니 아무렇게나 하소."

"큰 놈은 막 부득이 진방차지 청색이오, 그 남은 자식들은 제 소견에 좋은 대로 한 필씩 다 감아라."

흥보댁이 또 말하기를,

"저 두 말째놈은 온필로 감어서는 숨 막혀 죽을테니, 까치저고리 본보기로 각색 비단 찢어내어 어깨에서 손목까지 잡아 매어 드리우세 ."

", 좋으이. 그리하소."

흑공단을 한 필 빼어, 흥보 먼저 감을 적에, 상투에서 시작하여 뺨과 턱을 휘둘러서 목덜미 감은 후에, 왼 어깨에서 시작하여 손목까지 내려 감고, 도로 감아 올라와서 오른 어깨 손목까지 빈틈없이 감아 올라, 겨드랑이에서 불두덩에 차차 감아 내려와서, 두 다리 갈라 감고 두 발은 발감개하듯 디디고 썩 나서니, 여인네와 자식들은 상투가 없으니까, 머리 동여 시작하여 똑같이 감은 후에 항렬 차례대로 뜰 가운데 늘어서니, 흥보 보고 재담하기를,

"이게 어디 호사이냐, 늘어선 조를 보면 큰 마을 당산의 법수도 같고, 휘감아 놓은 품은 진상 가는 청대 죽물. 색으로 의논하면, 내 조는 까마귀. 아기 어멈 고추잠자리. 큰 놈은 쇠새, 여러 놈들은 꾀꼬리, 해로라기 새 한 떼가 늘어선 데, 저 두 말째 놈은 비단 장사 다니는 길에, 서낭당 나무로다. "

온 집안이 크게 웃고, 흥보가 하는 말이,

"이번 호사를 다 했으니 이 통 하나 마저 탑세."

흥보의 마누라가 박통을 타 갈수록 밥도 나오고 옷도 나오니 마음이 아주 좋아, 이 통을 또 타면 더 좋은 보물이 나을 줄로 속재미가 부쩍 나서,

"이 통 탈 소리는 내 사설로 먹일테니 집에서는 뒤만 맡소."

흥보가 추어,

"가화만사성이라니, 자네 저리 좋아하니 참기물 나오겠네. 어디 보세, 잘 메기소."

흥보댁이 메나리 목으로 제법 메겨,

"여보소 세상 사람, 나의 노래 들어보소. 세상에 좋은 것이 부부밖에 또 있는가."

"어기여라 톱질이야."

"우리 부부 만난 후에 설운 고생 많이 했네. 여러 날 밥을 굶고 엄동에 옷이 없어 신세를 생각하면 벌써 아니 죽었을까?"

"어기여라 톱질이야."

"가장 하나 못 잊어서 이 때까지 살았더니, 천신이 감동하사 박통 속에 옷 밥 났네. 만복 좋은 우리 부부 호의호식 즐겨보세."

"어기여라 톱질이야."

"한 상에서 밥을 먹고, 한 방에서 잠을 잘 때, 부자 서방 좋다 하고 욕심낼 년 많으리라. 암캐라도 얼른하면 내 솜씨에 결단나지."

"어기여라 톱질이야."

슬근슬근 탁 타 놓으니, 천만 뜻밖에 미인 하나가 아리따운 맵시를 하고 나오는데, 구름같은 머리털로 낭자를 곱게 하여 쌍용새김 밀화비녀 느직하게 찔렀으며, 매미 머리, 나비 눈썹, 추파같은 모자, 고운 흑백이 분명하고, 연지 뺨, 앵두 순에 박씨같은 고운 잇속, 삘기같은 두 손길, 세류같은 가는 허리, 응장성식 금수의상, 외씨같이고운 발시 보보생련 나오는 양은 해당화가 조으는 듯, 모란화가 말하는 듯, 쇄옥성으로 묻는 말이,

"흥보씨 댁이오?"

흥보가 깜짝 놀라서,

"이게 하도 괴이하여, 당치 않은 세간살이 그리도 많이 나을 적에 만단 의심하였더니 임자 아씨 오셨구나."

납작 엎드려 절을 하며,

"호 좁은 박통 속에 평안히 오십니까? 이 세간 임자시면 모두 가져 가옵시오. 쌀 서 말 여덟 되와 돈 석 냥 아홉 돈은 한끼 양식반찬하였삽고, 몸에 감았던 비단까지 도로 풀어 놓았으니, 한 가지 것 속이오면 벗긴 개자식이오."

저 미인 대답하기를,

"놀라지 마옵시고 내 말씀 들으시오. 당 명황 천보간에 머리를 돌려 한 번 웃음에 백 가지 아름다움이 생기니, 여섯 궁중의 후궁들의 분대를 무색케 하던 양귀비를 모르시오? 어양의 북소리 천지를 진동하여 오니 서쪽으로 가옵다가 아름다운 양귀비가 말 앞에서 죽으니, 마외역에 죽은 향혼 천하에 주류하여 임자를 구하더니, 제비 편에 듣사온즉 흥보씨 적선 행인 부자가 되었다니, 천자 서방 나는 싫으이. 육군 분발할 수 없데. 각선 강남의 부가옹 부자의 첩이 되어, 봄을 따라 밤을 새며 무궁행락하여 보세."

흥보가 저의 가속 흑각 발톱 단목다리 이것만 보았다가 이런 일색 보아 놓으니 오죽이 좋겠는가. 손목을 덤벅 쥐다 깜짝 놀라 턱 놓으며,

"어디 그것 다루것나, 살이 아니고 우무로다. 저러한 것 한참 좋을 제, 잔득 안고 채었으면 뭉게질텐데 어찌할까."

서로 보며 농탕치니, 흥보의 마누라가 좋은 보물 나오라고 소리까지 먹인 것이 못 볼 꼴을 보았구나. 부정 탄 손님 같이 불시에 틀려서, 손가락을 입에 넣고 고개를 외로 틀고 뒤로 돌아 앉으면서,

"저것들 지랄하지. 박통 속에서 나온 세간 뉘 것인 줄 채 모르고 양귀비와 농탕치는고. 당 명황은 천자로되 양귀비에게 정신 놓아 망국을 했다는데, 박통 세간이 무엇이냐. 나는 열 끼 곧 굶어도 시앗꼴은 못 보겠다. 나는 지금 곧 나가니 양귀비와 잘 살아라."

흥보가 가난하여 계집 손에 얻어먹어 가장 값을 못 했으니 호령이나 할 수 있나. 곧 빌기를,

"여보소, 아기 어멈. 이것이 웬일인가. 자네 방에 열흘 자면 첩의 방에 하루 자지. 그렇다고 양귀비가 나같은 사람 보려고 만리 타국 나왔으니, 도로 쫓아 보내겠나."

처첩하고 수작할 때, 박통 속이 우근우근 무수한 사람들이 꾸역꾸역 나오는데, 남녀 종이 백여 구, 석수목수와수토수 각색장인 수백 명이 각기 연장 짊어지고, 돌과 나무, 기와 등물 수레에 싣고, 썰매에 싣고, 소에 싣고, 말에 싣고, 지게로 지고, 떼비로 메고 줄로 끌며, 지레로 밀며, 방아타령, 산타령에 굿 치며 나오는데, 이런 야단이 또 있는가, 마른 담배 서너 댓참을 뚝딱뚝딱 서두르니 기와집 수천 간을 동학이 그득하게 경각에 지어 놓고 모두 다 간데 없다. 흥보 살살 둘러보니 강남 사람 재주들은 참으로 이상하여 벽 붙인 그 진흙을 어느 겨를에 다 말리어 도배까지 하였구나.

원채에 본처 두고, 별당에 양귀비요, 안팎 사랑 십여 채며 사면행랑에 노속이오, 사랑을 굽어보면 좌상에 손님이 가득차고, 사죽이 낭자하며 시부로 소일하고, 곳간마다 열고 보면 전곡이 가득가득, 남은 곡식 노적하고, 흥보는 심심하면 양귀비 데리고 후원에 화초구경, 옥난간 밝은 달에 둘이 마주 빗겨 앉아 예상우의곡을 한가하게 의논하니, 이러한 지상신선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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