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현대역 50선

토별가(완판본)_01

pitagy 2023. 4. 28.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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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순제 연간) 갑신년에 남해 광리왕이 영덕전을 새로 짓고 좋은 날을 택해 집을 지을 때, 동서북 삼해의 왕에게 사신을 보내 오기를 청하여 큰 잔치를 배설하니, 영타고 옥용적과 능파산 채련곡에 풍유도 장할씨고, 삼위로 구전단 등 선약을 싫토록 서로 먹고 이삼 일이 지나도록 실컷 놀아 주었더니, 좋지 않은 잔치는 없는지라, 잔치를 파한 후에 용왕이 병이 나서 임금 자리에 높이 누워 여러 날 신음하여 용의 소리로 우는구나.

수중의 온 벼슬아치들이 정성으로 구병할 때 수중에서 나는 것들을 연이어 쓴다. 술병 때문에 그런가 물 먹여 보고 양기가 부족한가 해구신도 드려 보고, 폐결핵을 초잡는지 풍천장어 대령하고, 비위를 붙잡기에 붕어를 써 보아도 백약이 무효하여 병세가 점점 심해진다.

온 나라가 허둥지둥하여 하늘에 빌더니, 하루는 오색 구름이 수궁을 뒤덮으며 기이한 말소리와 큰 향내가 사면으로 일어나며, 한 선관이 들어오는데 청하의와 명월패에 흰 새깃으로 만든 부채를 손에 쥐고 표연히 당에 올라 손을 들어 길게 인사하고 무릎을 거두고 옷자락을 바로하여 단정히 앉거늘, 용왕이 대경하여 공손히 묻기를,

"누추한 집에 천선이 강림하니 감사한 말씀 측량없사오나, 과인이 병이 있어 거동을 못하므로 문에 나아가 영접하지 못하였으니 무례하다 하지 마옵소서."

선관이 대답하되,

"은하수에서 배를 타고 장건과 배 뛰워 놀다가 여동빈의 편지가 와서 창오산에서 놀자기에 그리로 가옵더니, 오다가 듣사오니 대왕께서 몸조리를 잘못하여 오래 고생한다기에 뵈옵자 왔사오니, 재주는 없사오나 증세나 듣사이다."

용왕이 크게 기뻐 애련하게 하는 말이,

"우연히 얻은 병이 골수에 깊이 들어 백약이 무효하기에 반드시 죽을 것임을 알았더니, 옥황상제의 은덕으로 명의 선관을 보내시니 자세히 살펴 좋은 약을 이르소서."

저 선관 거동 보소. 두 소매 뒤 걷으며 손을 넌짓 들어 온 몸을 만져 보고 앞으로 물러 앉아 기색을 살핀 후에 묵묵히 생각하다가 용왕께 여쭈오되,

"대왕의 귀한 몸이 사람과 다른지라, 사람이라 하는 것은 오장육부 있는 병을 맥을 잡아보면 뛰는 것이 있거니와, 대왕의 귀한 형체 제 누구라고 짐작하리오. 눈빛이 영롱하되 돌과 바위 못 보시고, 두 다리가 높아 말소리를 뿔로 듣고, 턱 밑의 큰 비늘이 거슬러 붙었기에 화를 내면 일어나고, 입 속의 여의주가 조화를 부리오니 몸을 적시자 하면 못 속에도 잠겨 있고, 변화를 하자하면 하늘에도 올라가고, 용맹을 쓰자하면 태산을 부수고 큰 바다를 뒤집으니, 구름과 안개가 둘러싸고 벽력같은 호령이라. 이 형체 이 기상에 병환이 중하오니 인간 침약으로 누구라고 구하릿가. '황제소문''의학 입문' 같은 의서가 만병을 논하지만, 대왕의 저 병세는 그 중에 아니들고, 사람 몸에 소머리를 한 신농씨가 삼백초를 하였으되 대왕께서 당한 약은 그 중에 없는지라. 비늘 껍데기가 굳었으니 침이 어찌 들어가며, 화식을 안하니 탕약을 어찌 잡수릿가. 병세를 자세히 보고 이치를 생각하니 천년된 토끼의 간이 아니면 구할 길이 없습니다."

용왕이 묻자오되,

"토간이 어떠하기에 약이 된다 하십니까?"

선관이 여쭈오되,

"토끼라 하는 것이 묘방을 맡았기에 새벽에 닭이 울어 날을 비칠 때, 양기를 받아먹고 달에 들어가서 계수나무 그늘 속에 장생약을 찧을 적에 음기를 받아먹어, 해와 달빛의 음양기운이 간장 사이에 들었기에 토끼가 눈이 밝아, '눈이 밝다'는 별명을 가진 것은, '눈은 간에 속한다'하니 간장이 좋으므로 눈이 그리 밝사오니, 토간을 잡수시면 병환이 바로 낫고 장생불로 할 것이요, 만일 그 약이 아니면 화타와 편작이 좌우에 모시더라도 구할 수가 없사오니 힘을 내어 구하옵소서. 갈 길이 바빠서 그만 가옵니다."

소매를 떨치고 문 밖에 나서더니 선관은 간 데 없고, 맑은 옥피리 소리 공중에서 들리거늘, 용왕이 생각하되 토끼라 하는 것이 인간세상의 짐승이라, 명령을 내리시니 수궁이 진동하여 '임금이 부르시면 수레를 기다리지 않고 달려감이라', 만조백관들이 풀풀 뛰어 달려들 때, 태호 복희씨 '용이 하늘로부터 상서를 내리자 용으로 관직을 정했다'는 말이 <사기>에 있었으니, 용궁의 벼슬 이름 아주 옛날에 생긴 것이라서 조선과는 다르겠다.

동편에 문관 서고 서편에 무관 서서 양반을 구별하여 일시에 들어올 때, 좌승상 거북이, 우승상 잉어, 이부상서 농어, 호부상서 방어, 예부상서 문어, 병부상서 숭어, 형부상서 준치, 공부상서 민어, 한림학사 깔따구, 간의대부 물치, 백의재상 쏘가리, 금자광록 금치, 은청광록 은어, 대원수 고래, 대사마 곤어, 용양장군 이무기, 호위장군 장어, 표기장군 벌덕게, 육격장군 새우, 합장군 조개, 참군 매기, 주부 자라, 청주자사 청어, 서주자사 서대, 연주자사 연어, 주천태수 홍어, 청백리 자손 백어, 탐관오리 자손 오징어, 허리 긴 뱀장어, 수염 긴 대하, 구멍없는 전복, 배부른 올챙이 떼가 품계 차례 대로 들어와서 주르르 엎드리니, 조관들이 들어오면 '의관을 정제한 몸이 어로향에 끌려'서 향내가 날 터인데, 속 뒤집는 비린내가 파시평보다 더하도다.

용왕이 명령을 내리되,

"임금과 신하의 의가 서로 다름을 경등이 아는가?"

좌승상 거북이 여쭈오되,

"신의 집이 선세로부터 신명하기로 유명해서, 천문 지리를 통달하니 인간의 임금과 현인들이 다 그 힘을 입었으니, 하우씨가 천하를 다스릴 아홉 가지 큰 법 알기를 신의 선조가 가르치고, 주공이 수도를 낙양에 정하기를 신의 선조가 가르치고, 삼대 적 성군들이 천하를 다스릴 때, 구복과 서복의 운명을 쫓되, 대부사를 쫓고 백성의 뜻을 쫓았으니, 신의 집이 공이 많은 것을 만고에 전한 <사기>가 신의 집에 다 있어 임금과 신하의 나뉜 분수 중한 줄을 자세히 아나이다."

용왕이 또 물어,

"어찌하면 충신인고?"

좌승상이 여쭈오되,

"임금에게 좋은 것이면 제 몸 죽기를 돌아보지 않으므로, 진나라 개자추는 허벅다리 살을 베어 굶주린 진문공을 먹였고, 한나라 기신이는 고조를 대신해 불에 타 죽었습니다."

용왕이 또 물어,

"우리 수궁에도 그런 충신이 혹 있을까?"

우승상 잉어가 옆에 서서 생각하니, 같이 정승으로 함께 입시하였다가 문벌과 유식 자랑 좌승상은 했는데 나는 대답하지 못하면 '주발이 등에 식은 땀을 가득히 흘리는 것'처럼 무색하지 않겠느냐? 썩 나서서 대답하되,

"신의 집이 학문 좋아하는 것으로 만고에 유명하기에 천하의 대성인 공부자가 신의 이름 빌어다가 그 아들을 이름하고, 왕상 같은 정성이나 신의 집 아니면 효자될 수 없사오니, 작은 비단에 쓴 편지를 배에 품고 용문에 뛰여 올라 성군을 섬기오니, 천고의 <사기>를 모를 것이 없사오되, 충신이라 하는 것이 평시에는 알 수 없어, 어지러운 바람이 불때 강한 풀을 알 수 있고 세상이 혼탁할 때 충신을 알 수 있으니, 평시에 봉할 때는 다 모두 충신이나 환란을 당하면 충신이 귀합니다."

용왕이 말하기를,

"짐의 병이 위중하여 선의(仙醫)의 하는 말이 토끼 간을 못 먹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 하니 어떤 신하가 토끼를 잡아 짐의 병을 구하리오?"

공부상서 민어 여쭈오되,

"토끼라 하는 것을 얼굴은 모르오나, <사기>로 볼진대 중산의 소산이라. 몽염의 옛 일 같이 에워싸고 잡는 수니 정병 삼천 내어 주어 대장 고래 보내소서."

고래가 분을 내어 출반하여 여쭈오되,

"수륙이 다르니 수중에 있던 군사 육지싸움을 어찌할지 저런 소견 가지고도 문관임을 뽐내 좋은 벼슬 해먹고, 조금 위태한 일이면 호반에게 밀려하니, 배속에 있는 것이 부레풀 뿐이기에 하는 변통없이 하는 말이 고지식한 것과 같습니다."

공부상서 무색하여 아무 대답 없었구나,

한림학사 깔따구가 여쭈오되,

"토끼라 하는 것이 조그만한 짐승이라, 병환에 좋다면 대왕의 위엄과 덕망으로 그까짓 것 구하기가 무슨 염려 있으릿가? 토끼 몇 수 바치라고 산군에게 조서를 당장 올리리다."

용왕이 또 물어,

"조서는 한다 하고 누가 갔다 산군을 줄꼬?"

간의대부 물치 여쭈오되,

"표기장군 벌덕게가 의갑이 굳세옵고 열 발을 갖추어서 진퇴를 다 하옵고, 제 고향이 육지오니 조서 주어 보내소서."

게가 분이 잔뜩 나서 미처 말을 못 하여 입에 거품을 흘리면서 열 발을 엉금엉금 기어나와 변명한다.

"수궁의 벼슬들이 인간과 같지 않아서 세도로도 못 하옵고, 청으로도 못 하옵고 풍신과 물망으로 별도로 선택하여 하옵기로, 농어는 '큰 입과 작은 비늘' 잘 생겼을 뿐 아니오라 장한이 생각하고 소동파가 귀히 여겨 친구가 점잖키로 벼슬차지 이부상서, 방어는 '황하의 방어와 낙수의 잉어'가 유명할 뿐 아니오라 이름 자가 '천원지방'이란 방자 한 편 붙었기에 땅 차지 호부상서, 문어는 다리가 여덟이니 '수기치인의 팔조목'을 응하였고 이름이 글 문자니 예문차지 예부상서, 숭어는 용맹 있어 뛰기를 잘 하옵고 이름이 '재기준수'라는 빼어날 수자인 고로 군사차지 병부상서, 준어는 가시가 많아 사람마다 어려워하고 이름이 '용법엄준'이란 높을 준자인 고로 형법차지 형부상서, 민어는 배속에 갖풀 들어 장인에게 요긴하옵고 이름이 '이용만민'이라는 백성 민자인 고로 장인차지 공부상서, 도미는 맛이 있고 풍신이 점잖으되 이름의 윗자에 쓸 한자가 없고 아래에 고기 어자 안들었다고 상서등용 못하는데, 한림학사 깔따구는 이부상서 농어의 자식이요, 간의대부 물치는 병부상서 숭어의 자식이라. 저의 집 세력으로 입에서 아직 젖내 나는 것들이 요직의 벼슬을 하여 아무 이치도 모르고서 방안 장담 저리 하나, 수륙이 다르니 용왕이 한 조서를 산군이 들을 테요 저희들이 조서하고 저희들이 가라시오."

응왕이 들어 보니, 뿔쌍한 호반들이 문관에게 평생 눌려 분하여 이를 갈며 속을 썩이다가, 이런 때를 당하여서 큰 싸움이 나겠거든, 용안을 비쓱 들어 백의재상 돌아보며,

"토간을 구하기에 시각이 급한데 문무가 불화하여 골라 쓸 수 없으니, 문무간에 보낼 신하 선생이 천거하오."

귈어가 어찌하여 백의재상 되었는고. 수궁 벼슬하기 매우 어렵고 무섭다고 한가히 물러가서, 무릉도원에서 흰 갈매기와 백로로 벗을 삼아, '정승의 자리라도 자연과 바꾸지는 않겠다'는 장지화와 노는 고로, 수궁 군신들이 '강호선생'이라 존칭하여 수궁에 일 있으면 예관 보내 청해다가 의논을 하는 고로 벼슬없이 국사하니 당나라 이필 같이 백의재상 되었구나.

용왕이 병중하야 국사가 위태롭기에 의논 차로 모셔 와서 입시동참 되었더니, 궐어가 여쭈오되,

"'임금만큼 신하를 잘 아는 이가 없다'했으니 대왕이 정하옵소서. 자기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할 신하면 불가하다 하오리다."

남의 재기 짐작하기 좀 어려운 노릇이냐. 요임금이 곤 시켜 홍수를 다스리고, 공명이 마속 보내 가정(街亭)을 지켰으니, 허물며 병든 용왕이 신하 재주 알 수 있나 묻는 족족 당챦구나.

"합장군 조개는 온 몸에 갑주가 단단하니 보내면 어떠한고?"

"합장군은 진짜 장부라 보내면 좋을 테나, 도요새와 원수 있어 둘이 서로 다투다가 어부지리 되기 쉽사오니 보내지 마음소서."

"원참군 메기가 주옥으로 꾸며 만든 좋은 관과 긴 수염이 점잖으니 보내면 어떠한고?"

"요사이 물고기 죽이는 가루를 돌 밑마다 풀어 놓으니 민물근방에는 못 가지요."

"'녹봉을 후하게 주는 나라에는 반드시 충신이 있다'하니, 도미가 벌써부터 상서가 소원이라니 다녀오면 시키기로 하고 도미를 보내 볼까?"

"사월 팔일 가까우니 서울은 쑥갓이요 시골은 풋고사리 송기탕 찜감 보냈다가는 곧 죽지요."

"올챙이 배 불러 경륜을 많이 품었으니 보내 어떠할꼬?"

"한두 달에 못 올테니 개구리 되면 올챙이 적 일 알 수 있소?"

문답이 장황하여 오정 때가 되어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구나, 서반 중의 한 조관이 출반하여 여쭈오되,

"효도는 백행의 근원이요 충성은 삼강의 으뜸이라. 천성으로 할 것이지 가르쳐 하오리까? 신의 선대 할아비가 멱나수에 사옵더니, 절강으로 장가가서 굴삼여의 고기는 할아비가 얻어 먹고, 오자서의 고기는 할미가 얻어먹어, 부부지간 두 배속에 충혼이 잔뜩 들어 자손이 나는 대로 아주 배속 충신이요 대대 충신이라. 수중은 고사하고 세상의 사람들도 충심의리 아는 이는 잡아 먹는 법이 없고, 어부들이 잡았으면 사다 물에 넣는 고로 종족이 번성하되 여러 벼슬 아니 하고 좋은 벼슬 구하지 않고, 가문중에서 상자를 뽑아 주부 벼슬 세전하니, 황하수가 오래도록 국가를 모시옵고 기쁨과 슬픔을 같이 할 테니 신의 간을 잡수어서 대왕 환후 나을 터이면 곧 빼어 올리겠으나, 토간이 좋다하니 신의 정성대로 기어이 구하리다."

만조가 다 놀래어 에워서서 살펴보니, 평생 모두 멸시하던 주부 자라거든, 용왕이 의흑하여 자세히 묻는구나.

"토끼를 잡자하면 수국에서 인간세계 가기에 몇 만리 될 터이요, 허다한 천봉만학 어느 산을 찾아 가며, 삼백 모족 많은 중에 토끼를 어찌 알며, 설령 토끼를 만난다 해도 어찌하여 데려올지, 신포서의 충성과 공명의 지략이며, 걸음은 과보같고 눈 밝기는 이루같고, 소진의 구변이며, 맹분같은 장사라야 그 노릇을 할 터인데, 너의 생긴 모양 보니 어디 그러하겠느냐? 백소주 안주하기 탕감이 십상이다."

주부가 여쭈오되,

"충성지략 말 잘하기 흉중에 들었으니 외모 보아 알 수 없고, 외모로 본다해도 과보가 잘 걸어서 해를 쫓아 갔아오되 그 발이 둘 뿐인데 신의 발은 넷이옵고, 맹분이 힘이 세어 구정(九鼎)을 들었으되 목을 감추지 못하는데 신은 목을 출입하고, 대가리가 뽀쪽하니 백기의 지혜옵고, 허리가 넓었으니 오자서의 열 아름 둘레의 크기옵고, 코구멍이 좁사오니 의사는 넉넉하고, 볼이 아니 퍼졌으되 구변은 있사오니, 참혹하게 죽더라도 토끼를 잡아 올 터이오니, 토끼의 생긴 형용을 자세히 그려 주옵소서."

(용왕이 ) 추켜 ,

"충성스럽구나! 주부의 충성이여. 신하로구나! 주부의 신하됨이여."

화공 인어를 불러 들여 백옥으로 새긴 벼루에 먹을 갈고 각색 채색 고이 갈아, 비단을 펴놓고 좋은 붓을 빼어 들고 토끼를 그리려고 할 때 인어가 수궁의 화공이어서 토끼의 화본(畵本)이 없었구나, 만조가 걱정하더니 전복이 썩 나오며,

"내 전신(前身)이 꿩이라. 산중에 있을 때에 사냥꾼의 날이든 독수리 급한 변이 무디무디 일어날 제, 산중에 만만한 것이 나와 토끼 뿐이로다. 양자택일로 저 아니면 나 죽기로 어려움에 처해 서로 도와 구해주며 지냈으니, 금수가 달랐으되 불쌍한 처지가 각별하였기에 토끼의 생긴 형용, 속에 그저 눈앞에 아른거리니 내 말 대로 그려내라."

전복은 가르치고 화사는 그리는데, '촛불같은 횐 달' 바라보는 눈 그리고, '여기저기 새 우짖는 소리' 듣는 귀 그리고, '봄바람에 만발한 꽃' 향기맡는 코 그리고, '여기저기 뒹구는 밤과 도토리' 주워 먹는 입 그리고, '준견이 쫓는 발저는 토끼' 다라나는 발 그리고, 진나라 중서령이 붓 매었던 털 그리고, 두 귀는 쫑끗, 두 눈은 도리도리, 허리는 짤록, 꼬리는 짤막, 설설 그려내니 자라가 화상 받아 목에 넣고 움뜨리니 아무 염려 없었구나.

용왕전에 하직하니 용왕이 부탁하되,

"옛날에 진시황이 불사약을 구하려고 서시를 보냈더니, 큰못이 가로막아 오지 않아서 한 줌의 흙이 되었으니 그 아니 불쌍한가? 경 같은 장한 충성은 만고에 쌍이 없으니, 인간세계에 있는 토끼를 빨리 잡아 돌아와서, 짐의 병을 낫게 하면 땅을 자손에게 나누어 주어 그 공로를 갚을 테니 부디 가 조심하라."

주부가 하직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주부가 인간세계에 간다는 말을 집안에서 벌써 듣고 온갖 내외 친인척들이 전송차 다 모였다.

주부의 대부인이 주부를 경계한다.

"너의 부친 식욕 많아 낚시밥을 물었다가 청년 나이에 죽었기에, 독수공방 내 설움이 너 하나를 길러 내어,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아침에 나가 늦게 오면 문에 기대어 기다리고, 저문 때 나가 아니 돌아오면 이문에 기대어 바라보았더니, 네가 지금 벼슬하여 임금을 섬기다가 임금이 병환 계서 약 구하러 간다 하니, 임금과 신하가 간난과 사생을 함께 하는 것은 당당한 직분이니, 지성으로 구하다가 만일 약을 못 얻거든 모래밭에 뼈를 드러내 거기서 죽을 것이지 돌아오지 말지어다. 대대로 충신 집에 선조들의 덕을 더럽히게 될 것이니 두어서 무엇하리?"

주부가 여쭈오되,

"정성을 다해서 위로 임금의 병환 아래로 모친의 마음 둘 다 편케 하오리다."

주부의 마누라가 하직을 하는데, 그도 또 법도에 맞게 한다.

"부부의 화목한 정은 잠시 이별 어렵지만, 오륜을 마련할 때 '군신유의' 먼저 쓰고, '부부유별' 후에 쓰니 군신의 중한 의가 부부보다 더한지라. 임금을 위하다가 죽는데도 한이 없네. 당상의 늙은 어머니 내가 봉양할 것이요, 슬하의 어린 자식 내가 길러 낼 것이니, 집안 생각 아예 말고 토끼만 얻어다가 임금 환후 낫게 하오, '채찍을 휘둘러 만리 밖으로 사라지니 어찌 규방을 근심하는가'라는 말 낭군이 모르시오."

주부가 대답하되,

"부인 말씀 듣사오니 충신의 아내되기 부끄럽지 아니하니, 말씀대로 할 것이니 어머님을 지성으로 모시고 어린 것들을 자주 찾아 멀리 가게 하지 마소. 세상에 흉한 놈들 말굽자라 맛 좋다고 건져다가 삶아 먹지."

차례로 하직할 제,

"아저씨 평안히 다녀 오시오."

"헝님 평안히 다녀 오시오."

"조카 잘 다녀 오너라."

"소상강 손 빨리 다녀 오너라."

주부의 처가는 소상강이던가 보더라. 이종사촌 고동, 내종사촌 소라, 진외척숙 우렁, 육지사돈 달팽이 연이어 하직하는데, 천만 뜻밖 해구라는 놈 옆에 와 앉았거든, 주부가 물어,

"너는 어찌 예 왔느냐?"

"조카가 먼 데 가니 하직 차로 찾아 왔지."

주부가 화를 내어,

"우리집 내외척이 다 내력 있느니라. 고동, 소라, 우렁들이 내 목과 같아서 들락날락하는 고로 촌수가 있거니와 너는 어찌 친척관계가 있노?"

해구가 웃어,

"내 좆도 네 목 같아 서면 들고 앉으면 나오기에 주부에게 아저씨되지."

좌중이 광객이라고 해구를 쫓은 후에, 주부가 길을 떠나 수국퐁경은 조석에 보던 데라, 산중을 어서 찾아 만경창파 얼른 지나 천봉만학 두루 밟을 때, 역산의 밭두둑은 순임군 따비 흔적, 도산의 넓은 터는 하우씨 공 받던 데, 대악에 묻은 옥백 헌원씨 제사요, 이구산 노구 자리 숙양흘이 빌던 데라, 수양산 새 고사리 백이숙제의 청절 가련하고, 면산에 돋은 풀은 개자추의 충혼 적막하다.

태산의 공부자는 천하를 적다 하고 무우의 증점이는 봄옷을 떨쳤구나. 기산 아침볕에 봉황이 어디 가며, 농산 봄바람에 앵무가 말을 한다. 추역산 올라가니 태아검 묻히었고, 계명산 지나가니 옥소성 끊이었네. 낙안봉 어느 날에 범아부가 천상을 보았는고. 태행산 가는 구름 적인걸의 고향 생각, 상산에 흩어진 것 사호의 두던 바둑, 기산에 빈 것은 소부의 버린 쪽박. 부춘산 맑은 소리 엄자릉의 바람이요, 천목산 남은 향기 도연명의 국화로다. 여산의 큰 구렁은 진시황의 굴총터요. 현산의 이끼돌은 양숙사의 타루비, 낭거산 세운 비석 한공을 새겼으며, 팔공산 많은 초목 진나라 병사인가 의심하네. 향산의 깨진 것은 백낙천의 약솥이요. 화산에 남은 집은 진도남의 운대로다.

형산사 구름 걷기 한유의 정성이요, 용문산 눈이 오니 양공의 구정이라. 금성산 두른 송백 한승상의 사동이요, 무이산 좋은 천석 주회암의 금서로다. 향산의 긴 뱀은 수미진을 치고 있고, 숭산에 우는 학은 선관이 모았구나. 낙가산 관음보살 감주 병을 들고, 오대산 문수보살 감중련에 앉았구나. 구룡산 운화부인 금간옥첩 볼 수 없고, 천태산 마고선녀 상전벽해 수놓는다.

곤륜산 안기생은 선단바쳐 옥경 가고, 봉래산 적송자는 구름 깊어 못찾겠다. 관산 밝은 달에 피리가 처량하고, 무산 저문 비에 선녀가 소식 없다. 이곳저곳 두루 찾아 한 곳을 당도하니, 우산에 낙조하고 창오산에 구름 일고 회계산에 안개 덮여 천지 적막커늘, 바위틈에 몸 숨기고 혼자 앉아 졸더니 아미산에 달이 돋아 '영입평강' 밝았거늘, 여산 동남 오로봉을 밤 새도륵 찾아가니, 향노봉에 해 비치어 붉은 내 일어나고, 폭포 소리 요란커늘 잠깐 앉아 구경하니, 어떠한 식구 하나 온 몸에 이슬 적선 이슬을 흘리고서 앞으로 지나간다. 주부를 얼른 보고 인사를 부치는데 유식한 체하느라고 문자로 하여,

"객은 어디서 오는 길이오(客從何處來)?"

주부가 자세히 본즉 제 형용과 비슷하거든 문자로 대답하여,

"나라고 하는 이는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나그네로 정처 없거니와 거기서는 뉘시요?"

저것이 때답하되,

"내 성명을 이르자면 본사가 장황하여 입담간에 못 할 테나, 당신의 생긴 모습 나하고 비슷하니 내력을 말하오리다. 우리 선조께서 남해 수궁 벼슬하셔 대대 충신 지내더니, 조부님이 곧고 강직하여 임금에게 바로 고하다가 소인에게 참소 당해 인간세계로 유배가니, 다시 고향 못가시고 산중에 노닐며 바위 위에서 노래불러 안색이 초췌하고 형용이 야위어서 파리 하니, 인간세계의 사람들이 '얌전하고 불쌍하여 굴삼려와 같다'하여 당호를 지었으되 남해에서 왔다하여 남녘 남자 떼고 '온 세상이 다 취했지만 나만 홀로 깨어 있다'의 깰 성자 떼어, 남성선생이라 부르더니, 그 아내가 수중 있어 기다리다 못하여서 여필종부 찾아 나와 육지 사람 아주 되어, 자식들을 나은 것이 산 중에서 사는 고로 도토리를 주워 먹어, 참 나무 살이 올라 돌 위에 지나가면 나막신 신었는 듯, 가난한 우리 형세 이름 매양 질 수 없어 조부님 당호두고 대대로 불러가니, 아들도 남성이 손자도 남성이, 이후 중손 고손 나도 남성이라 한 것시오."

주부가 들어 본즉 동종이로구나. 한숨짓고 하는 말이,

"세상 일 알 수 없소. 우리 선조 형제분의 계파가 갈렸으니 우리는 별자 파요 오자하신 그 방계 조상이 육형제분이신데, 기운이 천하장사 삼신산을 싣고 있어, 이적선과 좋아하여 그 방조 죽은 후 적선이 와 조상하고 죽음을 두루 알렸으니, '여섯 마리 새우가 삼신산을 메고 다니다가 두 마리는 없어지고 네 마리가 메고 있는데 삼산이 흘러 지금은 어디로 갔나'라는 말이 지금까지 전하는데 우리 수궁에는 그 자손이 없기에 자손이 모두 끊어졌나 하였더니, 종씨 말씀 듣사오니 종씨가 그 자손 우리 집 종손이오."

남생이가 이 말 듣고 눈물을 펄펄 흘리면서 정성으로 하는 말이,

"본시 같은 뿌리에서 나왔는데 산수간에 갈리어서 이제야 상면하니 내 마음 반갑기는 측량이 없사오나, 종씨는 어찌하여 저러한 귀한 몸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길을 가십니까?"

", 우리 수궁에서 재변나서 해마다 물이 오염되어<?>, 수족들이 모두 없어짐이 가련키에 부득이 수정궁을 자리 옮겨 짓자 하되, 수궁에 지관 없어 청산 월중토끼가 눈이 그리 밝다기에, 수궁으로 모셔다가 대궐 터를 정하고자 하되 토끼의 생긴 형용 잘 모르기에 동분서주 여러 달에 지금 상면 못하였소."

남생이가 대답하되 ,

"산중에 일 있으면 모족들이 모두 모여 공사를 하는데, 나와 두껍이는 몸에 털은 없사오나, 네 발이 돋쳤다고 함께 매양 참여하더니, 요새 무슨 일 있는지 금월 십오일에 낭야산 취옹정에 일제히 모이라고 통문을 써 가지고 다람이가 돌렸으니, 내 집에 가 계시다가 그날 함께 가서 모족 모임 구경하면, 삼백모족 다 보시고 토끼 만나 보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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