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현대역 50선

토별가(완판본)_02

pitagy 2023. 4. 2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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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가 좋다하고 남생이의 집 함께 가서 뭍의 동종들을 면면이 지면하니, 집집이 돌려가며 착실히 대접하고 모임날이 돌아오니 남생이와 함께 낭야산을 찾아가니 털 좋은 친구들이 모두 들어 모이는데, 똑 이렇게 들어와 공부자가 <춘추>를 짓고 절필하던 기린, 천제의 엄격한 법 무섭다 코끼리, 투기많은 여자 암광스레 떠드는 큰 소리 사자, 흥문연에서 '칼을 빼어 춤을 추고(彈劍作歌)''배고파 산을 내려오는(飢熊下山)‘ , 강물은 동쪽으로 흐르고 밤에 우는 원숭이, 부르짓는 소리 바람따라 구렁에서 일어나는 산군 위엄 호랑이, 복희씨는 희생을 길러 포주를 충당했고, 문왕의 덕화는 장하시다 신성한 곳에서 유유하게 지내는 사슴, 공명이 말을 사냥하려다가 잘못하여 잡아 탄식한 노루, 한문공이 족보 짓던 붓의 후손 토끼, 산 속의 쥐잡기는 하루 천리 가는 명마도 못당한다, 호랑이 없는 산중엔 삵, 진시황을 네 아느냐 옛 무덤과 사당의 여우, '쥐에게 이빨이 없으면 무엇으로 담을 뚫을까' 살살 기는 쥐, 이랬다 저랬다 우롱하니 어찌 알꼬 박랑(博浪)에서 엎드린 다람쥐, 뿔 좋은 고라니, 털 좋은 너구리, 기름 많은 멧돼지, 벌통 뚜껑 감 오소리, 좋고 누런 털 족제비, 부리 횐 조이, 강남길을 어찌 갈꼬 엉금엉금 두꺼비 다 주워 모이더니 서로 높은 자리를 사양하며 기린으로 상좌를 정하니, 기린이 사양하여,

"나는 세상에 아니 있고 성인만 따라 다녀 얼른 왔다 돌아가니 동방 군자국에 갑자 원년 성인 임금 등극을 해 계시니, 잠깐 가서 다녀 오자고 한양으로 가는 길에 모족 모임 한다기에 얼굴을 알자하고 잠깐 찾아온 길이니, 여럿이 모인 높은 자리 손이 어찌 앉으리오?"

여러 번 사양하니 좌편에 별도로 만든 한 자리에 기린이 먼저 앉고 코끼리 사자며 곰과 원숭이가 그 밑에 앉은 후에, 산군이 주인으로 한가운데 주석하고, 우편에 사슴, 노루, 토끼, 여우, 삵 등의 무리가 차례로 앉은 후에 산군이 고개 들어 취옹정 글 써있는 현판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

"구양수 그 어른이 우리하고 원망이 있던가?"

토끼가 물어,

"어찌 하신 말씀이오?"

"'즐기던 사람들은 가고 새들만 즐겁다'는 새라는 글자는 둘을 쓰고 짐승 수자 안 썼으니 그것이 절통하다."

토끼가 대답하되,

"그 글의 힘을 볼진대 '새가 위 아래에서 운다'고 하였으니, 울 명자 아뢴 고로 짐승 수자 못 썼나보오."

사슴이 하는 말이,

"'사슴의 울음'이라니 내 소리는 울 명자가 아닌가?"

산군이 말을 꺼내어,

"오늘 모인 것은 근래 인심이 매우 무서워 짐승을 잡아 먹기 온갖 꾀가 다 생기고, 산중에 수목 없어 은신할 데 없으니, 애잔한 우리 모족 전멸할 것이 가련하기에, 한 자리에 모여 깊이 생각하여 각자 자기의 뜻을 말하고 들어보면 도모할 계책이 있을런지, 난을 피하는 방안이 혹 있을까 이 모임을 하였으니 노소를 가리지 말고 각자 그 계책을 자세히 말을 하라."

너구리 여쭈오되,

"소락의 소견에는 평생 미워하는 바가 있사오나 세력이 미치지 못하여 입을 열지 못하더니 하문을 하시기에 감히 아룁니다. 천지개벽한 연후에 사람이 제일 신령하니, 짐승이라 하는 것은 사람 위해 생겼으니, 성신의 하신 말씀 '오십에 고기가 아니면 먹지를 않는다'하니, 사람이라 하는 것은 짐승 잡아먹는 터이니, 사람 손에 죽는 것은 조금도 서럽지 아이하나 사냥개라 하는 것은 같은 우리 모족으로 사람에게 얻어먹으니, 다른 개와 같은 행세로 똥이나 먹여 주고 도적이나 지켰으면 주인 은혜 갚을 터인데, 무슨 놈의 아첨하는 무리로 냄새 잘 맡는 자랑하여 심산궁곡 층암절벽 찾고 찾아 드러와서, 여기저기 짖는 데도 냄새를 붙여 길을 찾아 굴속에 들었으되, 기어이 물어 내니 제 아무리 애썼으나 피 한 모금 고기 한 점 맛이나 볼 수 있소. 제 몸에 이도 없고 동료만 살해하니 그놈 소위 사냥개라. 산군님 이후에는 다른 짐승 살해 말고, 저 소위 사냥개를 세상에 있는 대로 다 잡아다 잡수시면, 오소리 뿐 아니오라 덕이 모든 짐승에게 미치오리다."

산군이 대답하되,

"사냥개라 하는 것이 소위 분통해 할 만한 것이니, 다 잡아다 먹었으면 네게 설분되고 나도 배 채우련마는, 일등 포수 따라 다녀 낮이면 앞을 서고, 밤이면 함께 자니 어설피 물었다가 조총 귀불이 번듯 총알이 쑥 나오면 내 신세 어찌되리?"

너구리 여쭈오되,

"그리하면 사냥개는 제명 대로 사오릿가?"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필요 없게 된 개는 삶아 먹힌다'하니, 저도 죽는 날이 있제."

노루가 말을 하여,

"오늘 이 모임에 산중 짐승이 다 모이고 기린 선생님이 뜻밖에 왕림하셨으니, 무슨 음식 장만하여 대접을 해야 하제?"

산군이 노루를 추켜세워,

"아마도 늙은이가 인사를 더 아는구나, 장선생 노루가 모임차에 늙은 노자 있는 고로 저런 말을 먼저 하제."

여우가 썩 나서며,

"다람쥐가 겨울나자 밤과 도토리를 많이 모와 두었으니 가져오라 하옵소서."

산군이 좋다하고 가져오라 분부하니 다람쥐가 생각한즉 좌중에 모인 식구 저 보다는 주먹 세어 어찌 할 수 없었으니, 저와 같이 만만한 놈을 제가 가려 또 내세워,

"쥐도 양식 많을 터이니 가져오라 하옵소서."

산군이 좋다 하니 쥐와 다람쥐가 애써 주워 모은 것을 다 갖다 바쳤구나.

좌중이 나누어 먹은 후 산군이 하는 말이,

"나는 실과를 못 먹으니 무슨 요기 해야 하지?"

여우가 또 나서며,

"산군님 그 식량에 사소한 짐승들은 입담 없어 못 할 터이니, 멧돼지 큰 자식이 지금 잡아 팔자 하되 열 냥 값이 푼푼하니 가져오라 하옵소서."

산군이 좋아라고 여우를 훨색 부추겨,

"()선생 여우가 얌전하여 내 식성을 똑 아는고, 내 옆에 와 앉으시오."

여우가 하하 웃고 팔짝팔짝 뛰어가서 산군 옆에 썩 앉으니, 멧돼지가 분이 나서 여우를 깨물잔들 임금 곁에 붙어 간신 짓을 오래하는 것들이요, 산군 옆에 앉았으니 호랑이의 위엄을 빌렸구나. 어찌 할 수가 없었으니 제 분을 못 이기여 백자 깨진 것을 입에 물고 으득으득 깨물면서 큰 자식을 바치니, 산군이 그 입으로 양볼을 제비 먹을 적에 여우가 옆에 앉아 자랑이 무섭구나.

"저희들이 못 생겨서 남에게 볶이어서 걱정하제, 나같이 행세하면 아무 걱정 하나 없제. 남의 무덤 바짝 옆에 굴을 파고 엎뎠으면, 사냥꾼이 암만해도 불을 지를 수도 없고, 쫓겨가다가도 오줌만 누면 사냥개도 할 수 없고, 아무 데를 가더라도 주관하는 사람에게 비위만 맞추면 일생 평안한 신세 거저 남의 일에 참여하고 놀제."

장담을 한참 하니, 물고기를 버리고 곰을 얻음이라, 곰이 매우 의기 있어 나앉으며 하는 말이,

"오늘 우리 모이기는 산속의 폐단을 없애자 하자더니, 사냥개는 없애려 하되 포수 무서워 할 수 없고, 애잔한 쥐와 다람쥐가 겨우나기로 마련한 살림을 다 빼앗겨 부모처자 굶길터요, 가세 부족한 멧돼지는 아들의 죽음으로 고통을 보았으니, 오늘 저녁 또 지내면 여우 눈에 못 보인 놈 무슨 환을 또 당할지 그놈의 웃음소리 뼈 저려 못 듣겠네. 그만하여 파합시다."

산군이 할 말 없어 파좌하고 일어서니 여우가 그 곰을 별렀다가 이간 부치던지 불 한 번은 받게 한다. 각각 하직하고 돌아갈 제 주부가 남생이 옆에 가만히 엎드려서 각 짐승들이 하는 말을 다 보고 들었구나.

모임을 파한 후에 토끼 뒤에 따라가며 푸른 산 돌길 그윽한 곳에 토끼를 한 번 불러,

"여보 토생원,"

토끼의 근본 성정이 무겁지 못한 것이 겸하여 몸이 작으니 온산중이 멸시하여 누가 대접하겠느냐? 쥐와 여우 다람쥐도,

"토끼야, 토끼야."

아이들을 부르는 듯 이름 불러 버르장머리없이 함부로 하는 것을 평생을 겪고 지내다가, 천만 뜻밖에 누가 와서 생원이라 존칭하니 좋아 아주 못 견디어 깡총깡총 뛰어오며,

"게 누구요, 게 누구요, 날 찾는 게 누구요. 상산의 사호들이 바둑 두자 나를 찾나, 죽림의 칠현들이 술을 먹자 날을 찾나. 청풍명월 채석 가자고 이백이 나를 찾나, 노와 삿대 잡고 적벽 가자 소동파가 나를 찾나. 인생부귀 물으려나 인생무상 가르치지, 역대흥망 물으려나 상전벽해 가르치지."

요리 팔짝 저리 팔짝 깡총깡총 뛰어오니, 주부가 의뭉하여 토끼의 동정 보자고 긴 목을 오무리고 가만히 엎뎠으니, 토끼가 주부 보고 의심을 매우 하여,

"이것이 무엇인고?"

제가 의심 내고 제가 도로 그 의심을 버려,

"쇠똥이 말랐는가, 이 산중에 무슨 솥 깨어진 것 같은 큰 재목감이 어찌 저리 묘하게 깨어져 있는가, 애고 이것 큰일 났다. 사냥 왔던 총쟁이가 화약심지 끌러 놓고 똥 누러 갔나보다. 바삐바삐 도망하자"

깡총깡총 뛰어가니, 주부가 생각한즉 그대로 두어서는 저리 방정맞은 것이, 이리저리 못가는 곳 없이 다니는 짓을 한없이 하겠거든 또 한 번 크게 불러,

"여보, 토생원."

토끼가 듣고 의심하여,

"누가 나를 또 부르노? 고이하다 고이하다."

아장아장 도로 오며 주부를 바라보니, 아까 없던 목줄기가 흙담 틈에 뱀같이 슬금히 나오거든, 의심나고 겁이 나서 가까이 못 오고서, 멀찌기 서서 보며 문자로 수작하여,

"내가 이 산중에서 나서 놀고 늙어 몇 해가 되었으되 이제 처음 보는 터에 나를 어찌 알고 무엇하러 불렀느뇨?"

주부가 대답하되,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가 공부자의말씀인데, 어이 그리 무식하여 가까이 아니 오고 처음 본다 괄세하니 인사가 틀렸구만."

토끼가 들어본즉 생긴 것과 말하는 게 옆에서 볼 수가 없거든, 옆에 와 썩 앉으며,

"뉘라 하시오?"

", 나는 수궁에서 주부 벼슬하여 먹는 자라요."

"산수가 서로 달라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 관계가 없는데 수궁의 조관으로 산중은 어찌 왔소?"

"'아침에는 북해에서 놀고 저녁에는 창오산에서 잔다'고 어디는 못 가겠소? 우리 용왕 장한 덕화 임금의 자리에 있으시고, 팔천리를 진무하니 하루도 쉼 없이 일들이 일어나는데, 신하가 재주 없어 찬양하기 어렵기에 용왕의 분부 뫼셔 임금을 보좌하는 인물을 구하기 위해 천하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오늘날 모족 모임 천행으로 만났기에 만좌를 다 보아도 왕을 보좌할 만한 신하는 '곰 아니면 표범이라' 선생 하나뿐이기로, 선생을 모셔 가자고 뒤를 따라 왔사오니 바라건대 토선생은 범수가 왕계 따르듯, 한신이가 소하 따르듯 나를 따라 가사이다."

토끼가 제 인물에 너무나 감사한 말이거든 제 소견도 의심하여,

"어떻기에 내 형용이 곰보다도 나으리요, 표범보다 나으리요?"

주부가 대 답하되,

"곰의 몸이 비록 크나 눈이 적고 털이 덮여 태양 정기 부족하니 미련하여 못쓸 터이요, 범이 비록 용맹하나 코 짧고 줄기 없어 중악이 낮고 우묵하니 단명하여 못쓸 테요, 선생의 기상 보니 잘 다스려진 세상의 정치 수완이 좋은 신하요, 어지러운 세상의 간사한 영웅이라. 눈이 밝고 속이 밝아 천문지리 다 알 테요, 몸이 작고 발이 빨라 산도 넘고 물도 뛰어 따라갈 이 없을 테니, 능란한 저 말솜씨가 소진의 합종인지, 가끔가끔 조는 것 공명의 춘수런가, 생긴 것이 모두 나라에 이로운 신하, 볼수록 모두 모든 성중 모족 중의 제일이니, 우리 수궁 가시오면 입상출장 저 공명을 따를 이 뉘 있을까?"

토끼가 들어본즉 주부의 하는 말이 저 생긴 형용하고 낱낱이 똑 같거든, 가만히 생각한즉 형용은 무던하나 속에 글이 없었으니, 수궁의 글 유무를 알아야 할 테거든 또 물어,

"수궁 조관 중에 문장이 몇이 되오?"

"문장조관 있으면 영득전 지을 때에 상량문을 못 지어서 인간세계까지 멀리 나와 글 잘하는 여선문을 청하겠소?"

또 물어,

"수궁에 훨썩 키 큰 조관 있소?"

"영덕전 상량할 제 키 큰 조관 가리는데 내가 상량하였지요. 그리 큰 수궁에서 나만한 키도 없소. 선생이 드러가면 키 큰 거인 방풍씨 드러왔다 모두 깜짝 놀라지요."

토끼가 생각한즉 너른 의장 좋은 구변 내 속에 흠뻑 들었고, 글 잘하고 키 큰 조관 수궁에 없다 하니, 내 지닌 네 조건 눌릴 데가 얼건마는 '고향 떠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하니 이 사세가 썩 떠나기 어렵구나. 한번 사양하여 보아,

"주부를 따라가면 좋기는 좋을 테나, 산속의 즐거움과 풍월의 흥겨움을 잊을 수가 없사오니, 어찌 따라갈 수 있소?"

주부가 물어,

"산속의 즐거움과 풍월의 흥겨움이 만일 그리 좋으면 나도 여기 함께 있어 수궁으로 안갈 테니, 이야기 조금 하오."

실없는 토끼 소견 제가 주부 속이기로 산림풍월 자랑할 때, 턱없는 거짓말을 냉수 먹듯 하는구나.

"청산에 봄이 오면 온갖 꽃이 만발하여 병풍을 두른 듯, 꾀꼬리는 노래하고 나비는 춤을 추어 좋은 풍류 놀기도 좋거니와, 공자 제자 육칠 관동이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 바람 쐴 때 따라가서 구경하고, 녹음과 방초가 꽃보다 나은 첫여름에 공자(公子) 왕손 답청 구경, 느러진 버드나무 사이에서 다투어 나타나는 푸른 저고리 붉은 치마 그네 구경, 기이한 봉우리 돌비탈 사이에서 여름 구름 피어오르고, 수풀 사이 샘에 피서하여 즐기는 목욕 구경, 여름 철 석 달 다 보내고 가을 바람이 일어나고, 옥같은 이슬이 서리되어 서리맞은 나뭇잎이 봄꽃보다 더 붉으니 세상사 아랑곳 않고 한가로이 지내는 누각과, 국화 피는 구월 구일 용산에서 술마시고 흥겹게 춤추는 좋은 구경, 모든 산에 새의 자취가 없어진 겨울을 나 혼자 맛에 겨워 용문에서 설경을 구경할 적에 구양수도 따라가고, 저는 당나귀를 타고 매화를 구경할 적에 맹호연도 따라서, 산간 사시 좋은 경치를 오는 대로 구경하여 임자 없는 청산녹수 모두 우리 집을 삼고, 값 없는 청풍명월 나 혼자 주인되어 암혈간에 살아가니 반고씨 적 시절인가? 나무 열매를 먹었으니 유소씨 적 백성인가? 이러한 편한 신세 시비할 이 뉘 있으며, 이러한 좋은 흥미 앗아갈 이 뉘 있으리? 수궁이 좋다 해도 '고향을 떠나면 곧 천해진다'하니 갈 수 없제 갈 수 없제. 회수를 건너면 유자도 탱자되니 안갈라제 안 갈라제."

주부가 들으면서 가만이 생각한즉 저를 훨썩 부추겼더니 좁은 소견 교만함이 나서 저렇게 덤벙대니, 되게 한번 탁 질러서 저놈 기를 꺾어 보자 천연스럽게 물어 보아,

"여보, 토생원, 이 말씀 다 하였소."

", 다 하였소."

"몹시 불어 제끼시오. 산에서 부는 바람 바닷바람 보다 훨씬 세니 귀가 시려 못 듣겠소. 수중에 있는 이는 산중 일을 모르리라 저렇게 과장하되 당신의 가련한 신세 낱낱이 다 이를 테니 당신이 드르시려오?"

"말씀하시오."

"천봉에 바람 차고 만학에 눈 쌓여 땅에는 풀이 없고 나무에 과실 없어 여러 날 굶은 신세 어둑침침 바위 틈에 고픈 배 틀어 쥐고 적막히 앉은 거동, 진나라 함곡관에 초회황의 신세런가. 북해상 큰 움 속 소중랑의 고생인가. 무슨 정에 눈을 감상하며 매화를 찾나 이삼월 눈이 녹아, 풀도 있고 꽃도 피면 주린 배를 채우려고 이 골 저 골 다니다가, 토끼 잡는 그물 빈틈 없이 둘러치고, 용맹스런 무사 날랜 걸음 소리치고 쫓아오니, 짧은 꽁지 샅에 끼고 코에 단내 풀풀 내면서 하늘 땅도 분간 못하고 도망할 제, 천만 뜻밖에 독수리가 중천에 높이 떴다가 날아 내려 앞 막으니, 당신의 불쌍한 정세 적벽 화전중에 목숨이 아니 죽고 간신히 도망타가 화용도 좁은 길목에 관운장 만난 조조로다. 어느 틈 무슨 경황에 기수 목욕 무우 바람, 사오뉴월 여름되면 당신 신세 더 어떻고? 수풀 깊고 날이 더워 진드기와 왕개미가 온몸을 침질하니, 잡자 해도 손이 없고 두르재도 꽁지 없어 볶기다 못견디어 산밑으로 내려오니, 풋나무 초군이며 김매는 농부들이 호미 들고 작대 들고 이목 저목 쫓아오니, 호랑이 피하려다 이리 만난 저 정경 어떻다 하겠는가? 그네 목욕 구경 생각 어느 틈에 날 터이며, 칠팔 구월 가을되면 공산에 잎 떨어져 산과목실 낭자하니, 물 것 없고 밥 많아서 모족에게 좋은 때는 일년 중 제일이나, 봉봉에 앉은 것은 매 받든 수왈자요, 골골이 뛰는 것은 내 잘 맡는 사냥개라. 몽둥이 든 모리꾼은 양 옆에서 몰이하고 조총 든 명포수는 총구멍에 화약박아 목목이 앉았으니, 당신의 급한 사세 하늘로 날아오를 터인가 땅을 쫓아 나올 터인가? 단풍 구경 국화 구경 내 소견엔 할 수 없네. 우리 수궁 같았으면 태평스럽게 즐거움을 누릴 터기에 모셔 가자 하였더니 화로 망할 살이 사주에 있어 못 가겠다 하시오니, 괵철이 말 아니 듣고 종실의 한신 죽음, 범려의 편지 불신하고 월나라 문종의 죽음, 선생 신세 불쌍하오. 내 행색이 바쁘니 부득이 가나이다."

하직하고 썩썩 가니 토끼가 따라오며,

"여보시오 별주부, 성정 그리 급하시오."

주부가 대답하되,

"내 할 말은 다 하였으니 불러도 쓸 데 없소. 평안히 계시옵소 산속의 즐거움을 누리시오."

앙금앙금 바삐 가니 토끼가 계속 따라오며,

"수궁에 들어가면 화망살을 면하릿가?"

"알기 쉬운 오행 이치 '물이 불을 이긴다'는 것을 모르시오."

"그것은 그러할 터이나, 타국에서 왔다 하고 천대를 하면 그 아니 절통하오?"

"어찌 그리 무식하오. 동해 사람 여상이가 주나라 왕의 스승이 되고, 우나라 백리해가 진나라 정승되니 무슨 천대 받겠소?"

토끼 하는 말이,

"우리 산중 친구들에게 하직이나 하고 가제."

"큰 일을 할 때에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꾀할 것이 아니라 하였으니, 각기 소견 다 다르니 '위험한 곳이니 가지 마라'고 말릴 이도 있을 테요, '그 일이 장히 좋으니 함께 가자'고 할 터이니, 길가에 집짓기라 삼년이 지나도 짓지 못할 테지요"

"우리 처에게 나 간다고 하고 가제,"

"꾀하고자 하는 바가 여자에게 미치면 망하는 법인 것을, 수궁에 가서 공명한 후 쌍교 보내 모셔 가면 오죽 좋겠는가?"

이리저리 살살 돌려 수작하며 가노라니, 방정맞은 여우 새끼 산모롱이 썩 나서며,

"이야, 토끼야 너 어디 가느냐?"

"벼슬하러 수궁간다. "

"이아야, 가지 마라."

"왜 가지 말래냐?"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나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으니 물이라는 것이 위태하고, 아침에 임금의 은혜를 받다가도 저녁에 죽임을 당하니 벼슬이 위태하니, 두 가지 위태한 일 타국으로 벼슬 얻으러 갔다 못되면 굶어 죽고 잘되면 비명횡사한다."

"어찌하여 비명횡사냐?"

"이사라 하는 사람 초나라 명필로서 진나라에 들어가서 승상까지 하였더니, 진나라 수도인 함양에서 허리를 잘려 죽임을 당했으며, 오기라 하는 사람 위나라 명장으로 초나라에 들어가서 정승이 되었더니, 귀척대신을 공격하여 죽이니, 너도 지금 수궁가서 만일 종은 벼슬하면 반드시 죽을 테니, '토끼가 죽으니 여우가 슬퍼한다'는 우리 정다운 처지에 내 설움이 어떻겠나,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토끼가 옳게 듣고 주부에게 하직하여,

"당신 혼자 잘 가시요, 나는 가지 못하겠소. 천봉백운 내 버리고 만경창파 가자기는 벼슬하잔 뜻일러니, 벼슬하면 죽는다니 객사하러 갈 수 있소?. 어진 벗 우리 여우 충고하여 좋은 데로 이끌어 하는 말을 내 어이 안 듣겠소."

주부가 생각한즉, 다되어 가는 일을 몹쓸 여우놈이 방정을 부렸구나. 여우하고 토끼 사이에 이간을 부쳐,

"좋은 친구 두었으니 둘이 가서 잘사시오. 제 복이 아닌 짓을 권하여 쓸데없소,"

돌아도 아니 보고 앙금앙금 내려가니, 토끼가 도로 오며 자세히 묻는 말이,

"복 없다니 웬 말이오?

주부가 대답하되,

"남의 둘이 좋은 정다운 처지 나진 말이 부당하나, 당신이 물으시니 할 밖에 수가 없소, 내가 육지 나온 지가 여러 달이 되옵기로 여우가 찾아 와서 자기를 데려가라 하되, 방정스런 그 모양과 간교한 그 심술이 떨어질 수도 가까이 할 수도 없을 터기에 못하겠다 떼었더니, 당신 데려간다는 말을 이놈이 어찌 알고 쫓아와서 방해하니 당신은 떼어 보내고 제가 이제 따라오제."

토끼가 곧이 들어,

"참 그러하단 말씀이오?"

"얼마 안 가서 알 일진데 거짓말 할 수 있소?"

경망한 저 토끼가 단참에 곧이 듣고 여우에게 욕을 하며,

"그놈의 평생 행세 사사건건 저러하제. 열 놈이 백 말 하더라고 나는 따라갈 테오."

그렁저렁 내려가니 해변 당도 하였구나. 만경창파 끝이 없어 바다 멀리 수면과 하늘이 하나로 이어져 한가지로 푸르게 되었으니 토끼가 깜짝 놀라,

"저게 모두 물이오?"

"그렇지요."

"저 속에서 살았소?"

"그러하오."

"코 구멍에 물 들어가 숨을 쉴 수 있소?"

"그러기에 내 코구멍은 조그만하게 뚫렸지오."

"내 코는 구멍이 크니 어찌 하자는 말씀이오?"

"쑥잎 뜯어 막으시오."

"깊기는 얼마나 하오?"

"우리 발목 물이지요."

"저런 거짓말이 있소. 만일 거기 빠졌으면 한 달을 내려가도 땅에 발이 안 닿겠소."

"나 먼저 들어갈께 당신은 서서 보오."

주부가 팔짝 뛰어 바다 위에 둥실 떠서 허위허위 헤엄하며,

"어디 깊어 ?"

토끼가 하하 웃어,

"당신 헤엄하오?"

"들어와 보면 알제."

토끼가 시험 차로 언덕에 앞 발 딛고 물 속에 두 발 넣어 시험하여 보려 하니, 주부가 달려들어 토끼의 뒷다리를 뎅겅 물어 잡아채니 토끼가 풍 빠져 서쪽 바다물을 많이 마셨다. 주부가 등에 엎고 해상에 등등 떠서 정처 없이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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