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설 현대역 50선

박흥보전_신재효본_04

pitagy 2023. 3. 26.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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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보가 졸부되었다는 말이 사면에 퍼져가니, 놀보 듣고 생각하여,

'그것 모두 뺏어다가 부익부를 하면 좋되 이 놈이 잘 안 주면 어떻게 처리할건고. 만일 아니 주걸랑은 흥보가 부자로서 제 형을 박대한다고 몹쓸 아전 뒤를 대어 영문 염문 적어 주고, 출패를 돈 백 먹여 향중에 통분내고, 도회까지 붙였으면 이 놈의 살림살이 단번에 떨어엎지.'

흥보의 사는 동내를 급히 물어 찾아 가니, 고루거각 오간팔작 벌집같이 빽빽하며 천문만호 즐비하고 웅장했다. 대문을 여럿 지나 안사랑 앞에 이르니, 흥보가 제 형을 보고 버선발로 내려와서 공손히 절을 하고 반기어 하는 말이,

"형님이 오십니까. 어서 올라가사이다. "

방으로 들어가서 상좌에 앉힌 후에 흥보가 두 손 잡고 고개를 숙이고서 조용히 사죄한다.

"박복한 이 놈 신세가 자분필사 하였더니, 선영의 음덕이며 형님의 덕택으로 부자가 되었기에, 자식들을 데리고서 형님 댁에 건너가서 형님을 뵈온 후에, 형님을 모시옵고 선산에 성묘하자고 날짜를 받았더니, 형님 먼저 오셨으니 하정에 황송합니다. "

놀보의 하는 어조는 좋게 하는 말이라도 평생 남을 잡어 뜯어,

"저러한 부자들이 우리같이 가난한 놈 찾아오기 쉽겠는가. 어찌하여 부자 된고?"

흥보가 제비 살려 박씨를 얻어 부자가 된 내력을 종두지미 다 고 하고,

"한퇴지는 취식강남이라 하더니 나는 좌식강남이오. 밥이나 옷이나 기명이 다 강남 것이오."

놀보 바로 가기로 들어,

"내가 집에 일 많은데 부득이 나왔더니 어서 가야 하겠고."

흥보가 만류하려,

"안으로 들어가서 처자나 보옵시고 무엇 조금 잡수어야 돌아가시는 채비를 하시지요."

놀보가 어서 가서 제비를 청할 터이나 양귀비 구경키로 흥보 따라 들어가니, 제수 나서 영접하여, 이 놈이 양귀비 찾느라고 눈을 휘휘 내둘러 수숙이 절한 후에 제수 먼저 문후하여,

"아주버님 뵈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니 기체 안녕하십니까?"

놀보놈의 평생 행세로 제수 보기를 종같이 하여 아주머니는 고사하고 하오도 안 했더니, 오늘은 전과 달라 앉은 방, 차린 의복, 새눈이 왈칵 띄어 홀대를 하여서는 탈이 정녕 날 듯하고, 경대를 하자하니 혀가 아니 돌아가서 매운 것 먹은 듯이 입을 불며 얼버무려,

", 평안하오."

흥보가 종을 불러,

"도련님네 계시느냐? 들어들 와 뵈오래라."

이것들이 멍석 구멍에 근본 길이 들었구나. 세 줄로 늘어 엎드리어 절하고 꿇어앉으니, 소위 백부되는 놈이,

'모시고들 잘 있더냐?' 하든지, '선영의 음덕이다. 좀들 잘 생겼느냐.' 하든지 할 말이 좀 많은데, 저 때려 죽일 놈이 흥보를 돌아보며,

"너 닮은 놈 몇 되느냐?"

흥보 부처 넓은 소견에 개같은 놈 탓하겠는가,묵묵히 말이 없었다. 자식들 나간 후에 또 종 불러,

"이리 오너 라."

이것들이 강남서 나왔기로 아주 열쇠같이 재빠르지.

"."

"강남 아씨 여쭈어라."

갑자기 미인 하나가 들어오는데, 당 명황같은 풍류 천자도 정신을 놓았는데, 놀보같은 상놈 눈에 오죽이나 놀라겠나. 보더니 턱을 채고 일어서 절 받기를 큰 제수에 비하면 갑절이나 공순하다. 양귀비 거동 보소. 옥수를 땅에 짚고 청산 눈썹 나직하고, 앵도순 반개 하여 옥쟁반에 구슬이 떨어지는 목소리로 문후를 하는데,

"먼 데 살고 천한 몸이 이 댁 문하에 의탁한 지 오래지 않삽기로 처음 문안드립니다. "

놀보놈이 제 생전에 처음 보는 미색이요, 처음 듣는 옥음이라, 넉넉잖은 제 언사에 어찌 대답할 수 없고, 떡 들입떠 안고 싶어 정신올 놓았구나. 벌벌 떨며 대답하기를,

"오시는 줄 알았더면 내가 와서 박타지오."

앵무같은 아이 종이 주물상을 올리는데, 소반 기명의 음식 등물은 생전에 못 보던 것. 형제가 함께 상을 받고, 종년이 옆에 앉아 술을 연해 권하는데, 놀보가 좋은 술을 십여 배 먹어 놓으니 취중에 광증이 나서, 참다가 못 견디어 양귀비 고운 손목 색 들입떠 쥐면서,

"술 한 잔 잡수시오."

다른 계집 같으면 뺨을 치며 욕을 하며 오죽 야단 났겠는가. 안색이 천연하여 좋게 대답하는 말이,

", 내가 물에 빠져요?"

놀보놈이 깜짝 놀라 손목을 썩 놓으며,

"일색뿐 아니시라 <맹자(孟子)>도 많이 읽었구나."

양귀비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니, 흥보의 마누라가 그 뒤를 따라 가는구나. 놀보놈이 무안하여 술상을 물리고서 무슨 심사를 부리자고 사면을 살펴보니, 좋은 비단 붉은 보로 이불을 덮었는데, 일어서서 쑥 빼내어 청동 화로 백탄 불에 부비어 던지면서 분담을 하는 말이,

"계집년은 내외하여 안으로 가려니와, 이불도 내외 하나?"

저 비단이 불에 붙더니 재가 되기는 커녕, 빛이 더옥 고와갔다.

놀보가 묻기를,

"그게 무슨 비단이냐."

"화한단이오. 불쥐털로 짠 것이라 불에 타면 더 곱지요."

"이애, 그것 날 다고."

"그리 하옵지요."

"또 무엇을 가져갈꼬. 네 그 첫 통 속에 쌀 들고 돈 들었던 궤를 둘 다 주려느냐?"

"부자된 밑천이니, 둘 다 어찌 드리겠어요. 하나씩 나눕시다. 어떤 것 가지시려우?"

"돈 궤를 가질란다. "

"그리 하옵시요. 또 무엇이 생각 있소?"

"다 주면 좋건마는 내가 바삐 가야겠기로 그것만 가져가니, 다시 생각나는 대로 연해 와서 가져가지, 내가 번번이 올 수 없으니 기별을 하는 대로 칭탁 말고 보내어라."

"그리 하오리다. "

벼루집같은 궤를 화한단 보에 싸서 제 손수 옆에 끼고 제 집으로 급히 가서, 문 안에 들어서며 종을 불러 하는 말이,

"짚 댓 뭇 급히 취하여, 돈꿰미 한 천 발을 어서어서 꼬와 오라."

안으로 들어가서 제 계집에게 자랑하여,

"여보소, 흥보놈이 참 부자 되었거든. 그 놈의 세간 밑천 내가 여기 뺏어 왔네."

화한단 보를 풀며,

"이것은 불에 타면 더 고운 것이라네."

돈 궤를 내 놓으며,

"이것은 돈이 생겨 부어 내면 또 생기지."

궤문을 열어 놓으니 돈은 난정돈, 몸뚱이는 예전 돈 꿴 듯, 구부려 누운 길이 넉 냥 아흡 돈만한 싯누런 구렁이가 고개를 꼿꼿 들고 긴 혀를 널름널름했다. 놀보 부처가 대경하여 궤문을 급히 닫고 노속을 바삐 불러,

"이것을 갖다가서 문 열어 보지 말고 짚불에 바로 살라라."

놀보 계집이 말리기를,

"애겨, 그것 태우지 맙소. 인제 그런 흥한 것들이 돈 나는 궤 주었다고 자세하면 어찌 하게. 구렁이 쌌던 보를 두어서 무엇하게.

그 보로 도로 싸서 급히 보내시오."

놀보가 추어,

"자네 말이 똑 옳으네."

사환을 급히 시켜 흥보집에 환송하니, 흥보 받아 열고 보니 구렁이는 웬 구렁이, 돈이 하나 가득하지. 제 복이 아니며는 할 수 없는 법이었다.

욕심 없는 놀보놈이 제비를 청하려고 차비를 장만할 때 이런 야단이 없었다. 신 잘 삼는 사람들을 십여 명 골라다가 매일에 서 돈 품삯에, 삼시 먹고 술 담배 착실히 대접하고, 외양간 더그매에 신삼을 찰벼짚을 여남은 짐 내어 놓고, 제비받개 수백 개를 밤낮으로 결어내어, 안채사랑행랑이며, 곳간사당뒷간채에 앞뒤 처마 다 지르고, 제 대가리 상투 밑에 풍잠을 지른 모양으로 앞뒤로 갈라 꽂고 제비 몰러 나갈 적에, 서리맞은 일이 월의 꽃보다 붉은 한산의 들길을 올라가고, 눈 개고 구름도 흩어진 북풍이 찬 초나라 오나라산을 다 찾았지만 제비 소식은 알 수 없다. 놀보가 제비에게 상사병이 달려들어, 길짐승은 쪽제비를 사랑하고, 마른 그릇은 모제비만 사고, 음식은 칼제비 수제비만 하여 먹고, 종이 보면 간제비를 접고, 화가 나면 목제비를 하는구나.

그렁저렁 겨울 지나 정월 이월 삼월 되니, 강남서 오는 제비 각 집을 날아들 제, 신수 불길한 제비 한 쌍이 놀보 집에 들어가니, 놀보가 제비를 보고 집짓기에 수고된다. 제가 손수 흙을 이겨 메주덩이만하게 뭉쳐 처마 안에 집을 짓고, 검불을 많이 긁어 소 외양간 짚 깔 듯이 담뿍 넣어 주었더니, 미친 제비 아니며는 게다 알을 낳겠느냐. 집을 잘못들어 알 여섯을 낳았더니, 마음 바쁜 놀보놈이 삼시로 만져 보아, 다섯은 곯고 하나만 까서 날기 공부를 익힐 때에, 성질이 모진 놀보 소견에 구렁이가 먹으려 할 때 쫓았으면 저리 되었을까. 축문을 지어 제사하여도 구렁이가 오지 않아, 대발틈에 다리 부러지면 제가 동여 살려줄까, 밤낮으로 축수하여도 떨어지지도 아니하여, 날기 공부하느라고 제 집 가에 발 붙이고 날개를 발발 떨면 놀보놈이 밑에 앉아,

"떨어지소, 떨어지소."

두 손 싹싹 비비어도 종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렁저렁 점점 커서 날아가게 되었는데 놀보가 실패하자 제비 절로 다리부러지기를 기다리면 놓치기 염려되니, 울려 놓고 달래리라. 제비집에 손을 넣어 제비새끼 잡아내어 연약한 두 다리를 무릎 대고 자끈 꺾어 마루바닥에 선뜻 놓고, 천연히 모르는 체 뒷짐지고 걸으면서 목소리 크게내어 풍월을 읊는 것이었다.

"황성에 허조 벽산월이오, 고목은 진입창오운."

안으로 돌아서며 제비새끼 얼른 보고, 생침 맞는 된 목으로 제 계 집을 급히 불러,

"여보소, 아기 어멈. 내가 아까 글 읊노라 미처 보지 못했더니, 제비 새끼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으니 불쌍하여 보겠는가. 어서 감아 살려 주세,"

저 몹쓸 놀보놈이 제비 다리 감으려 할 때, 흥보보다 더 잘 한다고 대민어 껍질 벗겨 세 겹을 거듭 싸고, 당사실은 가늘다고 당팔사 주머니 끈으로 단단이 동인 후에 제 집에 도로 넣고, 행여나 찬바람 쐴까 섶 두텁고 큰 포대기를 서너 겹 둘렀더니, 놀보를 망하게 할 제비기에 죽을 리가 있겠느냐. 십여 일이 지나더니 부러진 다리가 완합하여 비거비래 출입하더니, 연지사일 사소거, 강남으로 들어갈 때, 놀보가 부탁하여,

"여봐라, 내 제비야. 딱 죽을 네 목숨을 내 재주로 살렸으니, 아무리 짐숭인들 재생지덕 잊을 리 없지. 흥보의 은혜 갚은 제비가 세 통 박씨를 주었으니, 너는 갑절 더 보태어 여섯 통 열릴 박씨를 부디 수이 물고 오너라. 삼월까지 있지 말고, 과세 즉시로 발행하여 정월 보름 안에 당도하면 기다리기 괴롬잖고 오죽이나 좋겠느냐."

저 제비가 들어가서 놀보의 전후 내력을 장수 전에 고한 후에 박씨 하나 얻어두고 명춘 삼월 기다릴 때,

이 때에 놀보놈은 정월 보름에 제비 올까 앉은뱅이 삯군 얻어 강남 급주도 보내 보고, 안질난 놈 비싼 삯을 주어 제비 오는 망을 보아, 제비에게 드는 돈은 아끼지 않고 써 낼 때, 그렁저렁 삼월 되어 지붕 위에 오락가락 하는 제비가 놀보 집에 다시 오니, 놀보가 아주 반겨,

"반갑다, 내 제비야. 어디 갔다 인제 왔나. 김천씨 새에게 벼슬을 내렸으니, 벼슬하러 네 갔더냐. 상고의 유소씨가 나무로 집을 세웠으니, 그것 배우러 네가 갔더냐. 오의(烏衣) 옛 거리에 지는 해 빗기었다. 왕사당전에 네 갔더냐. 얼마나 많은 홍분이 진흙으로 쌓였으랴, 미앙궁전 네 갔더냐. 어이 그리 더디 와서 내 간장을 다 녹이느냐. 박씨 물어 왔거들랑 어서 급히 나를 다오."

손바닥을 떡 벌리니 저 제비의 거동 보소. 물었던 박씨 하나를 놀 보 손에 떨어뜨리고 두 날개 편편하여 돌아도 아니 보고 백운간에 날아가니, 놀보 좋아 춤을 추며,

"얼씨구나, 좋을씨고. 부익부를 하겠구나."

저의 가속을 급히 불러 박씨를 주며 자랑한다. 놀보 가속이 박씨를 보고,

"애겨 이것 내 버리소. 갚을 보(), 원수 구(), 바람 풍()자 쓰였으니, 원수 갚을 바람이니 어디 그것 쓰겠어요."

놀보가 대 답하기를,

"자네가 어찌 알아. 원수 구라 하는 글자 군자호구란 짝 구()자와 통용하니 어떠한 미인으로 내 짝 갚는다는 말이로세."

놀보 가속이 들어 보니 이런 죽을 말이 있나. 못 할말을 연해 하여,

"만일 그러하다면 바람 풍자는 웬일인가."

"바람 풍자는 더 좋지. 태호 복희씨는 풍()자 성으로 왕 하시고, 순임금은 오현금으로 <남풍시>를 노래하고, 문왕 무왕은 장한 덕화로 태평한 시대를 만들었으며, 주공은 성인이라 <빈풍시>를 지으시고, 한태조는 수수풍, 광무황제는 곤양풍, 와룡선생은 적벽풍, 대풍이 세 번 한나라를 도왔으니 장하다 하려니와, 백이숙제 고절풍, 엄자릉의 선생풍, 도정절의 북창풍이 만고에 맑았으니, 그도 아니 좋을손가. 우리도 이 박을 심어 솔솔 부는 봄바람에 입묘하여 사월 남풍 점점 자라, 우순풍조 호시절에 꽃이 피고 박이 열려, 팔월고풍 따서 켜면 보물이 풍풍 나와 집안이 풍덩풍덩, 근래 풍속 좋은 호사 갑사 풍차 금패 풍잠 학슬 풍 안경을 떡 고이고, 은 장식한 백마 높이 타고 봄바람에 달려, 풍호무운하여 보고, 구름은 엷고 바람 가벼운데 오천이 가까운 데에 방화수류하여 보고, 풍류스런 사람 좋은 팔자 밤낮 풍악으로 지낼 적에, 네 귀에 풍경 단 집 방안에 병풍 치고, 풍로에 차관 얹고, 풍석 없는 자네 배를 선풍도골 내가 타고, 풍편에 가끔 들리는 방아찧는 소리 풍풍 찧었으면 경수에 바람은 없는데 물결 스스로 일어나 잘금잘금 날 것이니, 그만하면 풍족하지 잔말 말고 심어 보세."

책력을 펴 놓고 씨뿌릴 날 가려 내어 사당 앞을 급히 파고 못자리 할 거름을 모두 게다 퍼 쟁이고, 단단이 심었더니, 아침에 심은 것이 오후가 겨우 되어 솟아난 큰 박순이 수종난 놈 다리만큼 자라났다.

놀보 아내 깜짝 놀라,

"여보시오, 아기 아버지 이것을 급히 빼 버리시오. 은나라의 나쁜 조짐으로, 아침에 났던 것이 저녁 때 큰 아람져서, .요물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정녕 재변이요."

놀보가 장담하여,

"나물이 되려는 것은 떡잎부터 알 것이니, 네다섯 달이 지나가면 억만금 세간살이 그 넝쿨에 날 터이니 일찍 아니 잡아 쥐지 않겠나."

이 박의 크는 법이 달마다 갑절씩이 더럭더럭 크는구나. 옆에서 순이 나고 순이 나고, 한 순이 커지기를 한 아름이 넘는구나. 어디가 턱 걸치면 모두 다 무너질 때 사당에 걸치더니 사당이 무너져 신주가 깨어지고, 곳간에 걸치더니 곳간이 무너지고, 왼 동내 집집마다 부지불각 턱 걸치면 무너지고 무너지고, 무너지면 값을 물고 무너지면 값을 물어, 그렁저렁 이렇게 든 돈이 삼사천 냥 넘었으니, 놀보가 벌써부터 박의 해를 보는구나.

꿎이 피어 박 맺을 때에, 첫 번 바로 북통만씩, 십여 일이 지내더니 나루에 거루선만하고, 한 달이 되더니 조창 세곡선만 하고, 여섯통이 열렸거든 놀보가 좋아하며 가르키며 국량하여,

"저 통 색이 노란 수가 속에 정녕 금이 들었지. 황금 적금이라니 은도 누르겠다. 어느 통에 미인이 있노, 그 통을 똑 알면 포장으로 둘러 두게."

한참 이리 걱정할 때, 허망이라 하는 놈이 성명을 듣고 행사 보면 이름이 헛되지 않음을 알겠구나. 동네 사람 앉으며는 놀보 공론하는구나.

"놀보같이 약은 놈이 박에다가 쓰는 돈은 아끼지 않고 써내니, 무슨 꾀로 돈 천이나 쓰게 할꼬."

허망이가 장담하여,

"나밖에 할 이 없지."

하고, 놀보 집에 건너가서,

"여보소 놀보씨, 박통 일을 알 수 없어 걱정을 하신다니 나를 어이 안 찾는가?"

놀보가 반겨 물어,

"자네가 알겠는가?"

허망이 대답하기를,

"모수가 자천 하는 말을 남은 암만 웃더라도 노형이야 속이겠나. 값 정하여 주었다가 박 타 보아 안 맞거든 그 돈 도로 찾아가소."

"그리 하기로 하세."

맞추면 천 냥 절가, 3백 냥 선금 내시고 박 속의 일을 알려 할 때, 허망이가 지닌 재주는 오행으로 점을 치는 복구분법이었다. 박통 노인 묏자리 복구분법으로 보아가니, 신통히 맞추거든. 첫 통 보고 하는 말이,

"모두 다 생금인데 누가 혹 가져갈까 노인 한 분이 수직한다. "

둘째 통을 한참 보다가,

"사람이 많이 들었구나."

놀보가 옆에 앉아 손수 장담하는 것이 더 우스웠다.

"집 지을 장인들과 종들이 들었나보이."

셋째 통 또 보더니,

"애겨 계집이 많이 있다. "

"서시가 나오는데 계집종들 따라오나,"

넷째 통을 또 보더니,

"풍류 기계가 많이 있다. "

"내가 두고 행락하라고."

다섯째 통 가리키며,

"그 가마 아주 길다. "

"나하고 서시 둘이 타라고."

여섯째 통 가리키며,

"그 말 아주 좋다. "

"타고도 다닐 테요. 밧줄.늘여 매어 두지."

"대강만 볼지라도 들 것 다 들었으니 어서 타고 보는 수일세."

책력을 펴 놓고 길일을 가려 내어 박통을 타려할 때, 섬 술 빛고, 섬 밥 짖고, 소 잡히고, 개 잡혀서 음식을 차린 후에, 팔 힘 세고 소리 좋은 건장한 역꾼들을 질끈 먹고 댓 냥 삯에 30명을 얻어다가 생금통 먼저 탈 때, 놀보가 좋아하며 제가 소리 메기는데, 똑 금이 나올 줄로 알고 금으로 메긴다.

"여보소 세상 사람 금 내력 들어 보소. 운남성 여수에 생겨나고, 흙 속에 묻히어서 전국 논객 소진은 구변으로 많이 얻어 실어 오고, 곽거는 효성으로 묻힌 황금솥을 파내었네."

"어기여라 톱질이야."

"오행의 가운데요, 팔음의 머리로다. 범아부를 이간시키기로 진평은 흩었는데, 고인이 주는 것을 양진은 어이 마다했는고."

"어기여라 톱질이야."

"나는 제비를 살렸더니 금 박통씨 얻었으니, 이 통을 어서 타서 금이 많이 나오며는 석숭을 부러워할까. 이 동네가 금록되리."

"어기여라 톱질이야."

"서시와 왕소군을 앉히도록 황금집을 지어 볼까. 자류청총 말을 달리게 황금채찍을 만들고저."

"어기여라 톱질이야."

슬근슬근 거의 타니 박통 속에 우군우군 글 읽는 소리가 난다.

"맹자 견양혜왕 하신대 왕왈 수불원천리 이래하시니 역장유이리 오국호잇까? 마상에 봉한식하니 도중에 늦은 봄을 보내는구나. 가련 놀보 망하니, 상전이라 할 자가 뵈지를 않는구나?"

놀보가 듣고 하는 말이,

"어디 그게 박 속이냐? 정녕한 서당이지. 글귀는 당음인데, 강포가 놀보 되고, 낙교가 상전되러 그것은 웬일인고."

한참 의심하는 중에 박통 문을 반만 열고 노인 한 사람이 나오는 데, 차린 복색이 제법이었다. 헐고 헌 체뿔관에 빈대 알이 따닥따닥 붙고, 생마포 적삼 위에 개가죽 묵은 배자가 무릎 아래 털렁털렁하고, 구멍 뻥뻥 헌 중치막은 아랫단에 황토 뭍고, 대대로 물려받은 묵은 바지는 오줌 싸서 얼룩지고, 석 자 가옷 홑베 주머니는 일가산 을 넣어 차고, 따닥따닥 기운 버선 네날 초혜 들메 신고, 곱돌 조대 중동 쥐고 개털 부채로 얼굴 가리고, 놀보의 안방으로 제 집같이 들어가니, 놀보가 보고 장담하여,

"흥보는 첫 통 탈 때 동자가 왔다더니, 내 박은 첫 통에서 노인이 나오더니 그로만 볼 지라도 관동지분이 있고, 저 주머니 속에 든 게 모두 다 선약이지."

바삐 바삐 따라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토깽이같은 낮에 빈대 코가 맵시 있다. 뱁새 눈 병어 입에 목소리는 아주 커서,

"이놈 놀보야, 옛 상전을 모르느냐? 네 할아비 덜렁쇠, 네 할미 허튼덕이, 네 아비 껄덕놈이, 네 어미 허천례, 다 모두 댁 종이라. 병자 팔월일에 과거 보러 서울 가고, 댁 사랑이 비었을 때 성질이 흉악한 네 아비놈이 가산 모두 도적하여 부지거처 도망하니 여러 해를 탐지하되, 종적 아직 모르더니 조선 왔던 제비 편에 자세히 들어보니 너희 놈들 이곳에 있어 부자로 산다기로, 불원천리하고 나왔으니 네 처자, 네 세간을 박통 속에 급히 담아 강남 가서 고공살이를 하라."

놀보가 들어 보니 정신이 캄캄하여 아무렇게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라 하자 한들 삼대나 되었으니 증인 설 사람이 없고, 싸워나 보자 해도 이 양반 생긴 것이 불에 넣어도 안 타게 생긴데다, 송사를 하자 하니 좋지 않은 그 근본을 읍촌이 다 알 것이니, 어찌 하면 무사할까. 저 혼자 궁리할 때, 저 양반의 호령 소리가 갈수록 무서웠다.

"이놈 놀보야, 옛 상전이 와 계신데 네 계집, 네 자식이 문안을 아니 하니 이런 변이 있단 말이냐. 이리 오너라."

박통 속이 관문 같이,

"."

범강장달허저같은 힘세고 무섭게 생긴 여러 놈이 몽치를 들고, 올바를 들고 꾸역꾸역 퍼나오니, 놀보가 이 광경을 보니 죽을밖에 수가 없었다.

엎디어 애 걸한다.

"여보시오, 상전님, 이 동네가 반촌이오. 아비의 가세 부요키로 관을 쓰고 지내오니 이 고을 통경내에 모모한 양반 댁이 다 모두 사돈이요. 이 소문이 나게 되면 소인은 고사하고 그 양반들 우세오니, 자라는 초똑목 꺽지 않는다는 말을 생각하여 아무 말씀 마옵시고 속전으로 바치옵게 속량하여 주옵소서."

"그 사이에 여러 십년 네 놈의 아비 어미, 네 놈과 계집 자식 고공살이 아니 하였으니 공돈은 어찌할꼬?"

"분부대로 하오리다. "

"네 놈 죄상을 생각하면 기어이 잡아다가 주야 악역 시키면서 만일 조금만 잘못하면 초당 앞의 말말뚝에 거꾸로 매어 달고 대추나무 방망이로 두 발목 복숭아뼈 꽝꽝 때려가며 부려먹자 하였더니, 네 말이 그러하니 또한 사람으로 좋게 대접하지. 공돈 속돈 바칠테면 지체 말고 썩 들여라."

놀보가 물어,

"몇 냥이나 바치올지."

"너만한 놈을 데리고서 돈 다소를 다투겠나."

조그마한 주머니를 허리에서 끌러주며,

"아무 것이든지 여기만 채워 오라."

놀보놈이 제 소견에 저 양반 저 억지에 많이 달라 하게 되면 이일을 어찌할꼬, 잔뜩 염려하였다가, 이 주머니 채우자면 얼마 아니들겠거든, 아주 좋아 못 견디어,

"그리 하오리다. "

주머니를 가지고서 제 방으로 들어가서 돈 열 냥을 풀어 놓고, 한 줌 넣고 두 줌 넣어 열 줌이 넘어가되 아무 동정도 없었다. 푼돈이라 그러한가. 양돈으로 넣어 보아, 닷 냥 열 냥 스무 냥을 암만 넣어도 간데 없다. 묶음으로 넣어 볼까, 스무 냥씩 묶은 묶음, 백 묶음이 넘어가도 형적이 없다. 이 주머니 생긴 품이 무엇을 넣으려 하면 주둥이를 떡 벌려서 산덩이도 들어갈 듯, 넣고 보면 딱 오무려 전과 도로 같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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