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영혜빙이 방관주를 맞기로 결심하다
한편, 영소저 혜빙이 본디 평범한 사람이 아니기에, 아버지의 명으로 방한림을 보니 목소리만 듣고서도 선악을 분별할 수 있었으니, 얼굴을 대하여야 알겠는가. 방한림이 비록 준수하나 오히려 영소저가 일생 닦아 온 거울에는 능히 잘 비추어지지 않겠는가. 제 말소리가 낭랑하나, 가늘고 말씨도 조용하고 나직하니,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한번 추파를 던져보고 쾌히 깨달아 깊이 생각을 오래 하더니, 일어나 내당으로 들어가, 고요히 생각하며 가로되,
“옛날부터 남자가 호탕해도 고운 얼굴이 있다고는 하나, 여자보다도 더 고우니, 어찌 이런 남자가 있겠는가. 이는 아름답고 어여쁘며 이슬 맞은 꽃송이처럼 맑고 깨끗하고, 무궁함이 환하고, 온갖 자태를 아름답게 지었으니, 반드시 어려서
부질없이 남복을 하였는데,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 권하여 여자의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없었으며, 끝내 누르기 어려워 예까지 이르렀으니, 진실로 가소로운 일이거니와, 내 보건대, 방씨는 얼굴이 맑고 깨끗하며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엄숙하여 일세의 기이한 남자라 할 만하도다. 이런 영웅 같은 여자를 만나 한평생 뜻이 통하는 지기가 되어 부부의 의리와 형제의 정을 맺어 일생을 마치는 것이 나의 소원이라. 내 본시 남자에게 총애받는 여자가 되어 통제를 받으며, 눈썹을 그리며 비위를 맞추는 것을 괴로이 여겨, 부부간의 금실이 좋아 북과 종처럼 서로 즐김을 원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이런 일이 있으니 이를 어찌 우연이라 하리오. 반드시 하늘이 뜻을 두심이라. 남편에게 수건과 빗으로 다스림을 받는 것은 구차한 일인데, 이보다는 낫지 않으리오.”
무쇠와 옥돌 같은 깨끗한 마음으로 이렇듯이 방침을 정하니, 세상의 일들이 더욱 뜬구름 같고, 넉넉히 주장한 바도 있으니,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운 일이로다. 옛날에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와 백아와 종자기의 지음을 일렀으나, 오늘날 지금에는 두 사람의 만남을 일컬을 만하도다.
6. 방관주와 영혜빙이 부부의 연을 맺다
시간이 빨리 흘러 백마가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보듯 하여 혼롓날이 닥치니, 두 집안에서 각각 혼례 기구를 성대하게 준비하고 예물을 보내며, 신랑이 신부 집으로 나아가니, 방한림이 옥처럼 아름다운 얼굴과 영웅다운 풍채로 혼례복을 입고 위엄 있고 엄숙한 행차로 종자들을 거느리고 신부집으로 가니, 향기로운 바람이 혼롓날을 축하하거늘, 금안장에 백마 탄 한림이 옹위 받아 나아가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탄복하며 극찬하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신랑이라.”
하더라. 영공의 집에 이르러 먼저 천지신명께 절하여 아뢰고, 신부가 가마에 오르기를 기다릴 때, 서평후가 붓과 먹 등을 내놓으며 최장시 짓기를 재촉하니, 이윽고 실소하고 산호 붓에 먹을 묻혀 채색 종이를 펴고 구슬 같은 글씨를 헤쳐 쓰기를 마치니, 받들어 전하여 아뢰기를,
“소자의 재주가 둔하여 장인어른의 높은 안목을 욕되게 하나이다.”
하니, 서평후가 이를 받아 보니 시상이 기이하여 바람으로 변했다가 다시 비로 변하는 듯한지라. 기쁜 웃음을 참지 못하고, 뭇 손님들의 칭찬이 분분하니, 영공이 이쪽저쪽으로 부산하게 돌아다니며 매우 기쁘고 즐거워하더라. 영공의 일곱 아들과 네 사위가 다 아름다우나 방생에 비하면 버려진 구슬이나 속이 빈 옥 같더라. 이윽고 신부가 꽃단장을 마치고 곱게 치장한 가마에 올라 칠보 발을 내리자, 한림이 순금 자물쇠로 가마 문을 잠그고 위엄과 예의를 갖추어 집으로 돌아왔더라.
맞절을 마치고 화촉을 밝힌 혼례식장으로 나아가 자하상1)에 술을 나누어 마실 때, 칠보 부채를 반쯤 열어 신랑이 눈을 들어 신부를 보니, 타오르는 듯한 광채가 사방을 밝게 비추고, 풍만하고 어여쁜 자태가 더욱 새로운지라. 석양에 신방으로 나아가, 한림은 수려한 눈썹에 묵묵한 근심이 잠겼고, 영소저는 그가 여자임을 알고 남몰래 기뻐하더라. 두 신랑과 신부가 이윽고 서로 대하며 오랫동안 있다가, 한림이 손을 들어 사례하며 말하기를,
“학생은 경박한 필부이거늘, 장인께서 지극히 후대하여 주심을 입사와, 소저를 바라보게 되었사오니, 그윽이 다행하여 서로 지기가 되기를 바라나이다.”
하니, 영소저가 얼굴을 바로 하고 옷깃을 여미어 자세를 바로잡으면서 이르기를,
“누추한 첩이 규방에서만 보고 들어 견문도 좁으며, 별로 쓸모가 없는 미천한 자로, 아버지의 엄명에 의지해 외람되게도 부부의 인연을 이루었으나, 어찌 지기를 삼을 만한 사람이겠사옵니까. 하오나 스스로 돌아보시어 여자의 식견을
어둡게 하지 마옵소서. 첩이 낭군께서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일을 누설하지 않으리니 너무 속이지는 마옵소서.”
하니, 한림은 의아하면서도 부끄러워 홀연 백옥같은 흰 얼굴이 붉게 물들었으나, 억지로 웃으면서 말하기를,
“부인의 말씀에 뜻이 있으나, 주인과 객이 만난 지 채 몇 시간도 안 되었는데, 속인다고 책망하시니 그 끝이 어디까지 미치리오. 자세히 풀어 말씀해주오.”
하니, 소저가 꽃 같은 얼굴을 낮춘 채로 정색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니, 한림이 그윽이 영씨가 자기 본색을 알아챘음을 깨닫고, 그 높고 밝은 식견에 경탄하였으나, 너무 맑고 바른 것이 기쁘지 않아 더는 입을 열지 않고 그 밤을 보냈더라.
다음날 신부가 폐백을 갖추어 한림과 함께 사당에 배알할 때, 한림과 어깨를 마주하며 술잔을 올리니, 한림이 옛일을 생각하고 슬픔에 젖어 눈물이 연꽃처럼 고운 두 뺨을 적시니, 소저 또한 감동하여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더라. 소저의 침소를 안채 해월각으로 정하니, 가장 큰 집이라. 붉은 다락과 옥난간, 비단으로 바른 창과 하얗게 꾸민 벽이 인간 세상 같지 않더라. 이날 밤에 한림이 정침에 이르니, 영소저는 규방에 있어도 한갓 통쾌하고도 사리에 총명한 여자라. 이미 한림이 여자인 줄 알고 이에 별같은 눈동자를 낮추고 자리르 비켜 앉으며 말하니,
“첩이 상공께 한번 고할 말씀이 있으니, 용서하소서.”
하니, 한림이 자기 본색을 알아 봄이 이 같음을 보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무슨 말로써, 복을 보고자 하시느뇨? 한번 듣고자 하나이다.”
하니, 소저가 옷깃을 여미면서 답하기를,
“소첩이 만일 한림을 알지 못했다면 어찌 당돌함에 미쳤으리오. 그윽이 헤아려보니, 한림께서 해와 달을 속이고 세상을 기망하여, 남녀의 옷을 바꾸어 입으셨음을 아노니, 사정을 한번 자세히 말씀해주시면, 첩이 죽을 때까지 저버리지 아니하리이다.”
한림이 이미 이처럼 맑은 결단에 항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프고 참혹해, 오래도록 옥 같은 얼굴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능히 기운을 수습하지 못하여, 한참 뒤에 팔을 들어 사례하며 말하기를,
“복의 근본은 소저가 의심한 것과 같소이다. 하느님께 무거운 죄를 얻어 여덟 살에 양친을 함께 여의고 외로이 제 한 몸만 궁벽한 시골 고향에서 남게 되어 어디에도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지요. 계교가 전혀 없어 스스로 이런 행동을 하게 되어 속절없이 세월이 흘러 이미 열 살이 되었는데도 어리석은 행색이 더욱 그칠 줄을 몰라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오늘 그대가 분명히 알게 되었으니, 감히 다시는 속이지 못하리다. 나는 이미 길을 잘못 들었고 바르지 못한 생각으로 살아가려는 마음이 있어 부부의 다정한 즐거움은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존경하는 영공께서 핍박하심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여, 소저의 인륜을 희롱하게 된 것이오. 부끄러움에 낯을 둘 곳이 없으나, 다만 내 본색을 누설할 수는 없으리니, 그대가 침묵하기를 바랄 뿐이오.”
하니, 영소저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첩이 이미 그대를 처음 볼 때 이미 분명히 알아보았느니, 이제는 그대와 함께 평생을 지내어도 족히 아내의 도리를 잃지 않으려니와, 다만 낭군이 나이를 많도록 수염이 나지 않으면 어느 사람인들 모르리오. 그 시절을 당하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하니, 한림이 처량하게 탄식하기를,
“모든 일이 되어감을 바라나니, 조금도 염려하지 않으나, 소저의 일생을 생각하니 위하여 가없거니와, 이미 나를 위하여 지기가 되어 일생을 함께 마치고자 한다면 우리 두 사람이 형제의 의를 맺어 서로의 호칭을 어지럽게 하지 맙시다.”
하니, 영소저가 기쁘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기를,
“그래서는 아니 되나이다. 그리한다면 자연히 드러나 부모님께서 알게 되시어 좋지 않으리니, 다만 우리가 부부의 예를 차릴 따름이라. 어찌 주저함이 있으리오.”
하자, 한림이 기꺼이 허락하고, 이에 팔뚝 위의 주표를 소저에게 보이니, 소저가 쌀쌀맞게 웃으며 말하기를,
“주위 사람이 보면 어찌하려 그러시나이까?”
하니, 한림이 말했기를,
“복이 스스로 깊이 감추었는데, 누가 능히 알 자가 있으리오.”
하니 두 사람은 함께 웃고, 다행함은 지기를 얻어 서로 뜻을 묻어버리게 되지 않았음을 기뻐하더라. 이후로 두 사람은 화평하고 즐겁게 지냈으니, 한림이 조정에 갔다 오면 내당에서 종일토록 지내고 외당에 손님을 모으지 않으니, 고요함을 더욱 칭찬하더라.
7. 방관주가 형주 안찰사가 되어 떠나다
화설, 방한림은 조정에 들어간 지 몇 년 만에 옥당에서 제일가는 선비가 되어 벼슬살이를 엄숙하고 강직하게 수행하고, 관대한 충절로 천자를 보필하니, 당나라 때의 위징과 한나라 때의 급암을 합친 듯하더라.
나이 비록 열세 살의 어린아이이나, 조정에서 어렵게 여김이 천자 다음이고, 추앙함을 스승처럼 하니, 한림이 법을 집행함이 해와 달이 밝게 비추듯 하여 벼슬은 날로 올라가고 충절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밝은지라. 천자가 사랑하고 중하게 여기어 태자보다 더 높이 하시고, 벼슬을 높이어 이부시랑 겸 태학사에 내리시니, 한림이 사양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행실을 금과 옥 같은 군자같이 하여 충절을 가다듬어 청렴하고 강직하게 하니, 조정이나 민간의 모든 이들이 두려워 고개를 숙이더라.
천자가 시랑을 보실 때마다 무릎을 모으고 말씀을 가다듬어 공경하고 마음을 가다듬으시며, 별호를 ‘강직현명렬’이라 하시니, 이로부터 명망과 맑은 이름이 더욱 무거워졌더라.
또한 천자가 영소저에게 봉황 무늬의 관과 꽃신을 내려 명부의 복색을 내리시니, 영광이 더욱 크게 빛나고, 풍채를 돋우더라. 시랑이 눈을 들어 소저를 보고 쌀쌀하게 웃으면 말하기를,
“부인이 나 같은 훌륭한 남편을 만나서 열세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나의 본부인이 되고 봉황 무늬의 관과 꽃신으로 벼슬을 돋우니 이른 나이에 높은 지위에 올랐음을 하례하나이다.”
하니, 영소저가 화관을 기울이고 붉은 입술과 흰 이를 드러내며 말하기를,
“이 모든 것이 그대의 은덕이옵니다. 그 훌륭한 덕이 산처럼 높고, 여자가 남편의 은총을 입는 것은 사리에 옳은지라. 어찌 도리어 아까워하시나이까?”
하니, 시랑이 크게 웃고, 또한 남자가 아님을 슬퍼하더라. 서평후는 이런 훌륭한 사위를 얻고, 부부 두 사람의 사랑하고 중하게 여김을 잠시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크게 하였으나 그간에 일어난 일을 어찌 알리오.
방시랑의 풍채와 명망을 흠모하여 소실을 들이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오나, 시랑이 괴로워 말을 막으며 말하기를,
“소생은 외롭게 홀로 살아온 몸이기에 번거롭고 화려하게 살 뜻이 없으니, 한 처자로 법을 지키어 평생을 마치고자 하느니, 어찌 다른 생각이 있으리오.”
하고 말을 마치고 기색이 눈서리 같으니 감히 다시 청하는 사람이 없더라.
차설, 자고로 소인배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지라. 간신이 임금께 아뢰기를,
“변방 인심이 괴이하고, 형주 주변 지역 인심이 소란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한 무리들이 모였사오니, 마땅히 이부시랑 방관주를 안찰사로 삼아 인심을 진정시키시옵소서.”
천자가 그 말을 좇으사 방시랑을 형주 안찰사에 제수하시니, 기한이 일 년이라. 시랑이 어쩔 수 없어 길을 떠날 새, 어전에 하직하니, 천자가 술을 내리시며 떠나가는 것을 아끼시더라.
집으로 돌아와 부인과 이별할 때, 두 사람이 다 헤어지기 서운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고 시랑이 부인의 고운 손을 잡고 이르기를,
“그대를 만난 지 몇 달만에 아주 친한 벗이 되어 잠시 이별함도 삼 년 같은데, 오늘 몇 년 동안 이별한 회포를 생각하니, 심히 슬픈지라. 바라건대 어진 벗은 몸을 잘 보존하고 제사를 정성으로 받듦을 바라나이다.”
하니, 부인이 답하기를,
“첩이 이미 그대의 아내가 되었으니, 제사를 당부하심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옵니다. 그러나 이별이 가장 괴로우니, 관중과 포숙아의 지기가 보통이 아니었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게 되었사옵니다.”
하니, 시랑이 일어나며 애틋한 마음으로 헤어지기 아쉬워하며 이윽고 선선히 일어나며 웃고 가로되,
“대장부가 나라에 몸을 허락하였는데, 어찌 아녀자의 태도를 하여 처자와의 이별을 아끼리오. 길이 탈이 없기를 바라나이다.”
하고, 말을 마치고 유모를 불러 몸을 잘 보존하라고 당부하니, 주씨 눈물을 비 오듯 이별하니 시랑이 가로되,
“어미는 어쩌려고 이리하느냐. 필경 내가 먼저 죽게 되면, 그대는 어찌할 것인가?”
하니, 유모가 크게 놀라고 낙심하며 말하기를,
“낭군은 말이 씨가 될지도 모르는데, 괴이한 말을 하시나이까?”
하며, 말을 마치고 가장 염려하니, 시랑이 밝게 웃으며 위로하고, 술을 내와 네댓 잔 기울이고 떠나더니, 부인을 두세 번 돌아보니, 잊지 못하는지라. 집안사람들은 다만 “지극히 사랑해서 그러는가.” 하더라.
길을 떠나 형주에 이르러 공무를 잘 다스리니, 몇 달 만에 교화가 크게 일어나고 풍속이 무척이나 온순하고 두터워졌으니, 밤에도 대문을 닫지 않고 남녀가 길을 양보하니, 극히 위엄과 덕망을 이르더라. 이렇듯 백성을 잘 다스린 지 오 개월이 지나자, 천자가 소식을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사 아름답게 여겨 불러 쓰려 하셨더니, 방안찰사는 타향 객지에 머무른지 오랜지라 규방의 미인이 외롭게 지냄을 걱정하고, 얼굴이 가물가물하며 임금을 그리워하는 신하의 회포가 날로 더 하더라.
8. 방관주가 우연히 아들 낙성을 얻다
이때 방안찰사가 맡은 일을 잘 처리하니 관아에 일이 없고, 계절이 바야흐로 바뀌어 따스한 동헌 정원의 꽃이 시들고, 상스러운 구름에 활짝 피었던 살구꽃이 빛나며, 오동나무의 가을빛이 완연해 경치가 몹시 아름다운지라. 방안찰사가 따르는 종들을 다 떨치고 미복의 푸른 도포를 걸치고 비단 두건을 쓰고서 두 명의 아이에게 담배와 거문고를 들려 근처의 명승지를 찾아가니, 점점 걸어 산골짜기의 바위 위로 들어가니, 시절은 구월 초순이라.
산속의 경치가 비할 데 없을 만큼 아름다워 국화가 활짝 피어 있고, 단풍은 붉은 비단 휘장을 둘러친 듯한데, 향기로운 바람이 가득 불고 산봉우리가 첩첩이 쌓여 있으며, 옥 같은 바위 절벽에서 폭포수가 잔잔하게 흘러내리고, 가을의 물이 한가로우니, 이에 바위 위에 올라가 거문고 줄을 고르며 담배를 태우고는 자주 노래하여 읊으니, 그 소리가 웅장하면서도 맑고 빼어났으며, 낭랑하면서도 우아하니, 이 진실로 옥을 깨뜨리는 듯한 맑은 소리라. 붓과 먹을 꺼내어 바위 위에 시를 한 수 썼는데, 그 시에서 이르기를,
가을바람이 소슬하니
나의 마음과 같도다.
살아 있음에 소원을 이루고
죽은 후에도 이름이 남으리라.
안찰사가 쓰기를 다하매, 아래에 제목을 달되,
‘한림학사 이부시랑 태학사 현명선생 방관주가 쓰노라.’
하였더라. 쓰기를 마치고, 덮고자 하더니, 문득 벼락이 진동하고 하늘이 분간할 수 없을지라. 동자는 놀라서 얼굴을 감싸고 엎어졌으나, 안찰사는 낯빛이 태연하여 날이 밝기를 기다리더니, 홀연히 천둥소리가 한 번에 큰 별이 떨어지니, 밝은 기운이 환하게 빛나면서 서기가 어리더니, 순식간에 날빛이 밝고 환해졌거늘, 안찰사가 다시 바라보니 별의 광채는 없고 옥같이 곱게 생긴 아이가 놓였는지라. 크게 놀라 보니 그 아이는 태어난 지 몇 달 정도 되어 보이되, 눈과 눈썹이 평범하지 않고, 두 눈동자는 거울 같아서 옥 같은 용모에 해와 달의 정기가 어렸는지라.
안찰사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주심이라.”
하고, 이에 자세히 보니, 영웅다운 기상이 넘쳐흐르고 가슴에 ‘낙성’'이라는 두 글자가 분명하니, 크게 괴상히 여겨 데리고 관아로 돌아와 유모를 구해 기르니, 이 아이는 날로 무럭무럭 자라나니 괴상히 여기며 이름을 ‘낙성’이라 하였더라.
낙성을 얻은 지 수십 일이 지났을 무렵, 서울 소식을 들으니 대장군 양덕이 죽었다 하는지라. 안찰사가 문득 깨닫고 그날 밤 천문을 보니, 과연 양장군의 주성이 떨어졌는지라. 더욱 이상하여 자기 주성인 문곡성을 보니, 광채가 찬란해 맑은 빛이 하늘 한가운데서 밝게 빛나 뭇별들의 광채를 빼앗고 있는지라.
스스로 벼슬이 높아질 것을 알더라. 계절이 또 바뀌느니, 다음 해 봄이 되었으니, 안찰사는 부인을 삼성과 상성처럼 여기기에 참지 못하였고, 탑전에 계신 임금님께 나아가 알현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더니, 천자가 안찰사의 정직함을 아름답게 여기사, 벼슬과 직위를 돋우어 병부상서 겸 추밀사로 부르시니, 안찰사 향안을 마련해 어명을 받들어 듣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올리고 길을 떠날새, 낙성을 데리고 서울에 도착해 조정에 들어가니, 천자가 반기사 은근한 말로 위로하시기를,
“경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짐을 도와 삼 년 안에 충성을 다했을 뿐 아니라. 형주의 소란한 인심을 반석같이 평정하고 돌아왔으니, 경의 공이 범상치 아니한지라. 어찌 국가의 고굉지신이 아니리오.”
하시고, 드디어 술을 내려주시니, 상서는 이 술을 받아 은혜에 사례하고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신이 폐하의 성은을 입어 얼마 되지 않는 약간의 공로도 없었는데, 다행스럽게 형주의 인심을 평정하여 작은 공을 이루었는데, 더욱이 폐하께서 내려주신 벼슬과 지위는 나이가 어린 신에게는 너무 외람되옵나이다. 거두어주시길 바라나이다.”
하니, 천자가 웃으면서 말씀하시기를,
“이번 조정에서 소중하게 여기는바, 경 한 사람이라. 짐이 이 벼슬과 녹봉을 더 내리지 않고 누구에게 주리오. 경은 고집을 부리지 마라.”
하니, 상서가 어쩔 수 없이 은혜에 감사하면서 아뢰기를,
“내려주신 향기로운 술이 온몸에 물들었사오니, 물러가고자 하나이다.”
하니, 천자가 윤허하시더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평후를 만나니, 매우 기뻐하며 상서의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가, 방상서의 장모와 모든 처남을 대하여 이별의 된 회포를 풀고 이슥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오니, 부인이 반겨 이별의 회포를 이야기할 새, 상서가 기쁘게 크고 작은 일들을 이야기하며 낙성을 얻게 된 연유를 이르니, 부인 또한 기특하게 여기며 유모를 데려다가 기르니, 낙성이 점점 자라 능히 상서를 아버지라 부르고, 모친을 지극히 따르니, 두 사람이 사랑하여 후사를 낙성에게 의탁하고자 하더라.
9. 김씨 집안과 아들의 혼약을 맺다
낙성 공자 네댓 살이 되니 기개와 도량이 비범하고, 옥돌로 만든 꽃처럼 화사한 풍격과 관옥처럼 아름다운 얼굴은 반악과 다름없었으며, 이백과 두보의 글재주를 갖춘 풍모가 있었으며, 두 눈은 샛별 같고, 이마는 강산의 맑은 정기를 거둬들였으며, 붉은 입술과 흰 치아는 곤산의 옥을 귀부로 다듬은 듯했으며, 풍채는 당당하고 빼어나서 늦은 봄의 가는 수양버들 같았고, 골격이 늠름하고 말쑥했으니, 짐짓 만 년 만에 태어난 인재요, 기린과 봉황의 새끼더라. 상서가 낙성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어여삐 여겼으며, 아끼기를 손안의 보배같이 하여, 잠시도 떠나지 않고, 낙성 또한 효성을
타고나서 육적이 가슴에 귤을 품고, 자로가 매일 쌀을 등에 지고 날랐던 효성을 본받아, 비록 나이 적은 어린아이였으나 날이 밝기 전에 세수하고 하루 종일 부모를 모셔 응대하는 모습이 노숙한 현인 군자 같았으니, 상서 부부가 더욱 사랑하여 글자를 가르치니, 하나를 들으면 백 가지를 통할 만큼 총명함을 가졌는지라.
낙성의 글이 날마다 빠르게 발전하고 시법이 기이해, 마치 뱃속에 일만 권의 책을 간직한 듯하고 입에는 일만 개의 진주를 머금은 듯하였으니, 이백의 청평사와 자건의 칠보시를 업신여겨 볼 정도였으니, 이는 하늘이 뜻을 두어 특별히 방상서의 서릿발 같은 충성심을 마음에 두어 마침내 후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심이라.
상서와 부인이 낙성을 어루만져 친자식을 얻음 같더라. 가히 옛날부터 지금까지 드문 일이더라. 이해 가을 팔월은 상서가 태어난 날이라. 이에 큰 잔치를 베풀고 조정의 모든 정승과 천자의 친척들을 청하여 즐길 새, 천자께서도 어악을 주시고 상방에서 음식을 내려주시니, 이처럼 성대한 잔치는 먼 옛날에도 드물더라.
방상서 내외가 수놓은 비단으로 꾸민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 가운데 흰 구름처럼 솟아 있었으니, 손들이 낙성을 보고 모두 기특하게 여기지 않는 이 없어, 상서가 친자식을 두어 복이 있음을 하례하더라. 잔치 자리의 추밀사 김희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명 신하라. 슬하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딸이 바야흐로 아홉 살이라. 얼굴 생김새가 매우 빼어나 마치 요지에 피어난 하늘 꽃과 옥섬돌에 핀 난초 같았으며,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부끄러워서 땅으로 떨어지고, 달이 숨고 꽃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아름다웠더라. 길쌈과 옷 깁기며 문장 짓는 재주도 뛰어나 견줄 사람이 없었더라.
이에 부모가 지극히 사랑하더니, 그날 추밀이 방공자를 보니 딸과 동갑이었으며, 진실로 당대 최고의 영웅 군자더라. 추밀이 낙성을 크게 흠모해 상서를 대하여 말하기를,
“제가 선생께 청할 말씀이 있으니, 가히 들어주시겠나이까?”
하니, 상서가 웃으면서 이르기를,
“벗께서 무슨 청을 제게 하시려 하시나이까? 듣기를 기다리나이다.”
하니, 추밀이 감사를 표하며 말하기를,
“다름이 아니오라, 오늘 아드님이 매우 준수하고 통달한 것을 보고 외람되게도 더러운 딸로서 우러러 진진처럼 좋은 인연을 맺고자 하느니, 가히 허락해 주시겠나이까?”
하니, 상서가 김소저를 어려서부터 보았는지라 기꺼이 허락하며 이르기를,
“형의 귀한 딸로서, 아우의 어린 아들에게 허락고자 하시니, 어찌 사양하겠나이까? 다만 두 아이가 다 어리니 몇 년 더 기다렸다가 혼례를 이루사이다.”
하니, 추밀이 크게 기뻐하며 두 번 세 번 감사하고, 상서와 추밀이 황하 물이 변하지 않고, 태산이 무너지지 않을 굳은 약속을 한 뒤에, 추밀이 공자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너는 이제부터 내 사랑스러운 사위라. 장인과 사위라 일컬어라.”
하고, 붓과 먹을 가져와 공자에게 글 지을 것을 청하니, 공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례하고, 산호 붓을 잡고 순식간에 칠언율시를 지어 두 손으로 받들어 부친에게 드리니, 모두가 신속하게 쓴 것을 칭찬하더니, 그 글을 보니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탄복하더라.
추밀이 기뻐함을 이기지 못하니, 상서 역시 기쁘게 고운 얼굴과 반짝이는 눈동자에 웃음을 띠면서 여러 손의 과찬을 겸손하게 사양할 뿐이러라. 즐거움이 극에 달하고 석양이 이르매 파연곡이 어지러이 울리니, 뭇 손님이 흩어지니, 상서도 내당으로 들어가 부인이 맞아 말씀을 나누되, 김소저와의 혼사를 말씀하니, 부인 또한 매우 기뻐하더니, 문득 주유랑이
나와 여러 번 탄식하며 이르되,
“일마다 부인과 낭군이 즐기시는데, 이는 바로 기둥에 이미 불이 붙었는데도 제비와 참새는 오히려 즐긴다는 것과 흡사하옵니다. 세상의 모든 초목과 금수라도 음양이 서로 어울리는 것이 떳떳하거늘, 낭군과 부인은 인륜을 사절하시며 스무 살이 넘기셨나이다. 두 소저의 붉은 옥과 초봄 같은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 아깝고, 위로 늙으신 두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사를 걱정하시니, 장차 나중에 어찌 되겠나이까?
더욱 부인은 침묵하시고 갈수록 고집을 부리며 지금껏 실상을 대부인께도 아뢰지 않으사, 한결같이 주표를 감추어 스스로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처럼 하시니, 어찌 괴이하지 않으리오. 바라건대 두 분 주인께서는 짐짓 좋은 계교를 생각하사 짐짓 훌륭한 군자를 얻어 황영의 자매처럼 지내는 것이 옳을까 하나이다.
첩이 누설하고자 하나, 낭군께서 하도 강고하시기에 발설이 어려워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어찌 애달프지 않으리오? 어린 공자도 오래지 않아 부인을 얻으려니와, 상공과 부인께서는 어느 시절에 인륜을 차리려 하시나이까?”
말을 마치기 전에 부인은 수려한 말소리와 얼굴로 묵묵히 길게 앉아, 봉황의 눈썹을 찡그리며 정색을 하였는데, 상서는 두 눈을 부릅뜨고 꾸짖기를,
“할미는 어찌 그런 괴로운 말로 즐거운 기분을 상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더욱 의심하게 하는가? 만일 괴이한 소문이 있게 되면, 비록 젖을 먹여 품속에서 기른 은혜가 있을지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을 마친 후 버들 같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왈칵 성을 내니, 주씨 어쩔 수 없이 물러 나오더라. 이에 부인이 냉소하며 말하기를,
“문백 형은 어찌 우연한 일을 가지고 이렇듯 심하게 유모를 꾸짖으시나요? 유모는 오로지 주인을 위한 충성심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라. 또한 아름답지 아니하오?”
하니, 상서가 봉황 같은 눈을 흘겨 뜨고 영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이르기를,
“부인은 여자의 도리를 알 때라. 어찌 가장의 자를 함부로 부르는가? 내가 오히려 묘주라 알았는데, 부인의 일이 가히 옳다고 할 수 있는가?”
하자, 영부인이 낭랑하게 웃더라. 상서의 나이가 스물네 살이 되도록 수염이 나지 않았으나, 당시 사람들이 아름답고 절개가 있음을 칭찬하되 능히 의심하는 사람이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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