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쓰기

구미호_마음 정화사_03

pitagy 2025. 8. 10. 01:00
728x90
반응형
728x90

3화. 여우의 노래 01 _ 다솜, 상사화(相思花)의 눈물

 

이야기는 한여름, 비단처럼 윤기 나는 녹음이 절정에 달했을 때 시작된다.

 

남쪽의 유서 깊은 양반 가문, '월하정(月下亭)'의 정원은 시간이 멈춘 듯 스산한 늦가을의 풍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붉고 노란 잎들이 생기 없이 바닥에 나뒹굴었고, 연못의 물은 온기를 잃었으며, 그곳을 찾는 이들은 까닭 모를 깊은 고독감에 휩싸여 시름시름 앓다 나오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치유사 다솜은 홀로 월하정을 찾았다. 그는 인간의 슬픔에 너무 깊이 공감한 나머지, 자신의 털빛마저 은은한 슬픔을 머금은 푸른빛을 띠는 구미호였다.

 

정원에 들어선 순간, 다솜은 공기 중에 짙게 배인 '그리움의 메아리'를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닿지 않을 인연을 평생에 걸쳐 기다리다 스러져간 한 영혼의 사무치는 한()이었다. 그의 '()'의 꼬리가 가늘게 떨리며, 그 한의 진원지인 연못가의 낡은 정자로 그를 이끌었다.

 

그곳에는 수십 년 전,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간 정인(情人)을 기다리다 병을 얻어 죽은 기녀, 소월(素月)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영혼은 정자에 묶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같이 정인이 돌아올 길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끝없는 기다림이 바로 이 정원을 시들게 하는 '탁기'의 근원이었다.

 

다솜은 소월의 영혼에게 섣불리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정자 기둥에 조용히 기대앉아, 자신의 아홉 꼬리 중 '슬픔의 꼬리'를 풀어 소월의 영혼을 부드럽게 감쌌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당신의 기다림의 무게를, 제가 함께 짊어지겠습니다.“

 

그의 능력은 강제적인 정화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상대의 슬픔과 같은 높이로 낮추어, 그 고통을 온전히 함께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었다.

 

다솜의 눈물: 시들어버린 모란의 노래

 

다솜이 낡은 정자 기둥에 기대앉아, 자신의 '슬픔의 꼬리'를 소월의 영혼에 부드럽게 겹쳤을 때, 그의 세상은 소월의 세상이 되었다. 그의 푸른 눈에, 한 여인의 흑백 필름 같은 일생이 파노라마처럼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1. 거문고와 달빛의 만남

 

화면은 달빛이 비단처럼 쏟아져 내리는 기루(妓樓)의 후원(後園)에서 시작된다. 열여덟의 소월(素月), 당대 최고의 기생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거문고를 타면, 시끄럽던 주객들마저 숨을 죽였다. 그녀의 연주는 단순한 곡조가 아니라, 한 편의 시()이자, 그림이었다.

 

그날 밤, 그녀의 거문고 소리에 다른 이들보다 더 유심히 귀를 기울이던 한 사내가 있었다.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던 가난한 선비, 한빈(翰彬)이었다. 그는 그저 멀리서 넋을 잃고 그녀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고, 모두가 박수를 칠 때 그는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낭자의 연주는마치 붓으로 난을 치는 듯, 고고하고도 애절하구려. , 연주하신 곡이 어떤 시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소?"

 

소월은 놀랐다. 자신의 아름다움이 아닌, 자신의 예술에 대해 물어온 사내는 그가 처음이었다.

 

"이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을 제 마음대로 풀어본 것이옵니다."

 

"역시 그랬군. 달과, 그림자와, 나의 외로운 영혼이 비로소 하나가 되는 그 쓸쓸한 환희가, 낭자의 손끝에서 그대로 느껴졌소."

 

그 밤, 두 사람은 술이 아닌, 시와 음악으로 밤을 새워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영혼이 같은 언어로 말하고 있음을, 그들은 첫눈에 알아보았다. 흑백의 화면 속, 두 젊은 남녀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2. 모란의 약속

 

시간이 흐르고, 한빈이 한양으로 떠나야 할 날이 밝았다. 이른 새벽, 마을 어귀의 나루터에서 두 사람은 이별을 앞두고 있었다. 소월은 밤새 수를 놓아 만든 작은 비단 주머니를 그에게 건넸다. 주머니에는 부귀와 명예를 상징하는 붉은 모란 한 송이가 탐스럽게 수놓아져 있었다.

 

"부디, 장원급제하시고 이 천한 기생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소월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한빈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따뜻하게 감쌌다.

 

"어찌 그대를 잊겠소. 그대는 이제 내가 쓰는 모든 글의 주인이오. 기다려주시오, 소월. 내년 이맘때, 이 나루터에 모란이 다시 필 때쯤, 나는 반드시 금의환향하여 그대의 이름을 부를 것이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걸고, 그대를 이 기루에서 데리고 나오겠소.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오."

 

그 약속은, 그녀의 남은 평생을 지탱할 희망이자, 그녀를 옭아맬 잔인한 족쇄가 되었다.

 

#3. 시들어버린 스무 번의 모란: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

 

다솜의 영적인 시야가, 소월의 기나긴 기다림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갔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느꼈던 모든 설렘과 불안, 희망과 절망을,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똑같은 무게로 견뎌내는, 끔찍하고도 신성한 공감의 과정이었다.

 

# 3-1. 첫 번째 봄: 설렘으로 피어난 모란

 

한빈이 떠난 첫해의 봄은, 온통 설렘으로 가득했다. 나루터의 모란이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자, 소월의 마음도 함께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매일 아침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혹시나 그가 올까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나루터를 서성였다.

 

그녀는 그를 위해 새로운 거문고 곡조를 짓고, 그가 돌아오면 함께 마실 좋은 술을 사두었다. 그녀의 방은, 곧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는 새색시의 방처럼, 희망과 기대로 반짝였다.

 

"나리께서는, 분명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하실 거야. 약조하셨으니까."

 

과거가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급제자들의 명단이 나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소월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작은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니야. 한양에서 이곳까지는 먼 길이니. 분명, 더 큰 뜻을 위해 잠시 지체하시는 것일 게야. 나는 나리의 부인이 될 사람이니, 의연하게 기다려야지.'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해의 모란은, 그녀의 희망 속에서 붉게 피었다가, 이내 기다림 속에서 시들어갔다.

 

# 3-2. 세 번째 봄: 풍문으로 전해 들은 모란

 

세 번째 해의 모란이 피었을 때, 마침내 한양에서 내려온 한 상인에게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 한빈 나리! 알다마다요! 2년 전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시어, 지금은 임금님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계시다오. 워낙 인재인지라, 지금은 저 멀리 북쪽 변방의 수령으로 가 계신다 합디다."

 

그 소식을 들은 순간, 소월의 심장은 기쁨과 슬픔으로 동시에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나의 나리께서, 마침내 뜻을 이루셨구나!' 하는 벅찬 기쁨.

그리고, '하지만어째서 나를 찾아오지 않으셨을까. 어째서 이리도 먼 곳으로.' 하는 서늘한 불안감.

 

그녀는 애써 불안을 지워냈다.

 

'그래, 나랏일이 얼마나 바쁘시겠어. 나 같은 기생 하나를 데리러 오시기엔, 너무나도 높은 분이 되셨지. 하지만 약속을 잊지는 않으셨을 거야. 분명 모든 것이 안정되면, 사람을 보내실 게야. 나는 그저, 믿고 기다리면 돼.'

 

그녀의 희망은, 이제 더 이상 순수한 설렘이 아니었다. 불안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위태로운 약속의 끈을 필사적으로 붙잡는, 처절한 '믿음'이 되어 있었다.

 

# 3-3. 열 번째 봄: 비웃음 속에 시드는 모란

 

열 번의 봄이 지났다.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 이제 기루에서 소월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녀의 미모는 기다림에 스러졌고, 그녀의 거문고는 먼지가 쌓인 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녀를 찾던 손님들의 발길은 오래전에 끊겼다.

 

어린 기생들은 창밖만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뒤에서 수군거렸다.

 

"저기 봐, 모란 귀신이야. 아직도 그 십 년 전 선비를 기다린대."

"쯧쯧, 가엾기도 하지. 사내의 약속만큼 덧없는 것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아마 한양 어딘가에서 예쁜 마나님 얻어서,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겠지."

 

한번은, 갓 들어온 어린 기생이 악의 없이 물었다.

"언니, 그렇게 기다리는 게 힘들지 않으세요?"

 

소월은 텅 빈 눈으로 창밖을 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기다리는 것이 힘든 게 아니란다. 혹시라도 내가 기다리지 않는 그 순간에 나리께서 오실까 봐, 그게 두려운 것이지."

 

그녀의 희망은 이제, 그녀를 세상과 단절시키는 거대한 성벽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성벽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십 년 전의 약속이라는 좁은 창문 하나로만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 3-4. 스무 번째 봄, 그리고 마지막 순간

 

스무 번의 모란이 피고 졌을 때, 소월의 생명도 함께 시들어가고 있었다. 끝없는 기다림은 그녀의 폐부를 갉아먹는 병이 되었다. 그녀는 골방에 누워, 밤낮으로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그녀의 눈앞에는 이제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보였다. 때로는 나루터에 서서, 막 한양으로 떠나는 한빈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지었고, 때로는 십 년 전 동료 기생들의 비웃음 소리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녀의 시간은, 스무 해의 기다림 속을 영원히 맴돌고 있었다.

 

다솜의 시야에, 마침내 그녀의 마지막 순간이 비쳤다.

 

숨을 거두기 직전, 그녀는 깡마른 손으로 품속에서 낡고 해진 모란 주머니를 꺼내,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한빈에게 주었던 것과 똑같은, 자신을 위해 만들어두었던 것이었다.

 

그녀의 텅 빈 눈동자는, 열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이제는 검붉게 시들어가는 모란 가지를 향해 있었다. 그녀의 마른 입술이, 마지막 남은 생명의 잔해를 쥐어짜 내듯, 아주 희미하게 움직였다.

 

"나리오셨군요."

 

그녀는 환영을 보았다. 마침내 금의환향한 한빈이,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환영을.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 환영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 이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병으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이라는 잔인한 고문에, 스무 해에 걸쳐, 서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시들어 죽어간 것이다.

 

화면이 암전된다.

 

다솜은 숨을 멈췄다. 스무 해의 세월. 한 여인이 겪었던 그 길고 긴 희망고문의 무게가, 고스란히 그의 영혼을 짓눌렀다. 나루터의 찬 바람, 동료들의 비웃음, 골방의 싸늘한 공기, 그리고 마지막 순간의 헛된 환희까지.

 

그의 푸른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다솜의 눈물이었지만, 동시에 스무 번의 봄을 홀로 울어야 했던, 소월의 눈물이기도 했다.

 

첫 만남의 설렘, 이별의 애틋함, 그리고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희망이 어떻게 절망으로, 기다림이 어떻게 고문으로 변해가는지, 그 모든 감정의 풍파를 자신의 것처럼 생생하게 느꼈다.

 

그는 동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소월과 함께, 그녀의 아픔 속에서 함께 울고 있었다.

 

한참을 함께 울어준 뒤, 다솜은 '사랑의 꼬리'를 꺼내 들었다. 그 꼬리에서는 억지스러운 위로나 망각의 빛이 아닌, 순수한 '인정(認定)'의 온기가 흘러나왔다.

 

"소월님. 당신의 사랑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끝이 슬펐을지언정, 누군가를 이토록 깊이 사랑했던 당신의 마음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었습니다.“

 

다솜은 그녀의 슬픔을 지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슬픔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사랑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바로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돌아오지 않는 정인을 향한 원망과 한으로 가득했던 소월의 영혼에서, 어두운 기운이 걷히고 순수했던 사랑의 기억만이 남아 영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랬군요. 나의 사랑은아름다운 것이었군요."

 

소월의 영혼은 마침내 미소를 지으며 한 줌의 빛이 되어 흩어졌다. 그녀가 사라진 정자 주변으로, 잎과 꽃이 평생 만날 수 없어 '상사화(相思花)'라 불리는 붉은 꽃들이 일제히 피어났다. 그것은 더 이상 슬픈 저주가 아닌, 한 여인의 고귀했던 사랑을 기리는 아름다운 징표가 되었다.

 

월하정의 가을은 끝이 났고, 다시 푸른 여름이 돌아왔다. 다솜은 조용히 정원을 나서며, 진정한 치유는 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껴안게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겼다.

728x90
반응형

'소설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미호_마음정화사_06  (9) 2025.08.18
구미호_마음정화사_05  (5) 2025.08.14
구미호_마음정화사_04  (7) 2025.08.11
구미호_마음정화사 02  (7) 2025.08.08
구미호_마음정화사_01  (5) 2025.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