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쓰기

구미호_마음정화사_05

pitagy 2025. 8. 1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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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의 노래 03 _ 가람, 그림자 없는 짐승

 

북방의 험준한 산맥 '낭림령(狼林嶺)'. 그곳은 한때 비단길의 중요한 길목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죽음의 고개로 불리기 시작했다.

 

밤마다 나타나는 '그림자 없는 짐승'에게 상인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것은 늑대도 호랑이도 아닌, 어둠 그 자체가 뭉쳐 만들어진 듯한 형상에, 인간의 무기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족의 수호자 가람이 이 소문을 듣고 낭림령으로 향했다. 칠흑 같은 검은 털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눈을 가진 그는, 탁기가 물리적인 형태로 발현된 악귀(惡鬼)를 베는 전문가였다. 그의 허리춤에는 '()'의 힘이 봉인된 칼이 매달려 있었다.

 

생존자의 증언

 

낭림령을 넘기 전 마지막 주막은, 활기 대신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상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굳은 얼굴로 술잔만 기울일 뿐, 누구도 선뜻 고개를 넘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삿갓을 쓴 나그네 차림의 가람은, 그들 틈에 앉아 조용히 술을 마시며 소문을 듣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은, 주막 가장 구석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늙은 상인에게 향해 있었다.

 

그는 어젯밤, 고개에서 '그것'을 만나고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자였다. 평생을 비단길만 오가 잔뼈가 굵은 그였지만, 지금은 술잔을 쥔 손을 덜덜 떨어 술을 반이나 흘리고 있었다.

 

한 젊은 상인이 용기를 내어 그에게 물었다.

 

"왕 서방님정말, 보셨습니까? 그 짐승을."

 

늙은 상인, 왕 서방은 텅 빈 눈으로 젊은이를 쳐다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것처럼 갈라져 나왔다.

 

"짐승이라니. 그건 짐승이 아니었네."

 

그의 말에 주막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달이유난히 밝은 밤이었지. 그런데 갑자기, 숲의 모든 소리가 멎었어. 귀뚜라미 소리, 바람 소리까지도. 그리고는뼈 속까지 시린 한기가 몰려오더군. 겨울밤의 추위와는 다른, 마치 무덤 속에 들어온 듯한 그런 한기 말이야."

 

그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놈은숲의 가장 깊은 그림자 속에서, 스르르 기어 나왔어. 늑대보다 크고, 호랑이보다 날랬지만, 털도, 가죽도 없었네. 그저, 밤의 어둠보다 더 새카만, 순수한 어둠 덩어리였지. 가장 기이했던 건달빛이 쨍쨍한데도, 그놈에게는 그림자가 없었다는 거야. 마치, 그놈 자신이 그림자인 것처럼."

 

왕 서방의 목소리가 격해지기 시작했다.

 

"경호 무사들이 칼을 휘둘렀지만, 칼날은 연기를 베듯 그놈을 그냥 통과해 버렸어. 그놈은 울음소리도, 포효도 내지 않았네. 그저'서걱, 콰직' 하는, 살점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는 소리만이 밤공기를 채웠지. 비명 소리가 들리고이내 잠잠해지고또 비명이 터져 나오고."

 

그는 울음을 터뜨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놈은 재물에도 관심이 없었어. 비단 꾸러미를 갈가리 찢어발기고, 약재 상자를 박살 냈지. 마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증오하는 것처럼 말이야. 나는나는 마차 아래 틈새에 몸을 숨기고, 죽은 척 숨도 쉬지 않았네. 그놈이 내 바로 위를 지나가는데수천 개의 원망 서린 눈이, 그 어둠 속에서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어."

 

주막 안에는, 모두의 공포 어린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다음 날 새벽, 가람은 홀로 낭림령 고갯길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왕 서방의 상단이 습격당했던 참상의 현장에 도착했다.

 

그곳은, 지옥이었다.

 

가장 먼저 코를 찌른 것은,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아주 오래된 무덤을 파헤친 듯한 역한 흙냄새, 그리고 영혼이 썩어가는 듯한 악취였다. 가람은 그것이, 순수한 악의와 원한이 응축된 '증오의 탁기'가 풍기는 냄새임을 단번에 알았다.

 

눈앞의 광경은 처참했다. 값비싼 비단들은 갈가리 찢겨, 진흙과 피에 범벅이 된 채 나뒹굴고 있었다. 튼튼했던 마차는, 마치 거인의 손에 의해 짓이겨진 것처럼 산산조각 나 있었다. 말들은 목이 졸린 것이 아니라, 사지가 잔인하게 찢겨 있었다. 그것은 약탈의 흔적이 아니었다. 오직 파괴와 살육만을 위한, 광적인 분노의 흔적이었다.

 

그리고사람들이 있었다.

 

경호 무사들의 시신은, 갑옷이 종잇장처럼 찢긴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극심한 공포와 함께, '자신이 무엇에게 죽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혼란이 그대로 굳어 있었다.

 

가람은 눈을 감았다. 그의 영적인 시야가, 이 땅에 남겨진 보이지 않는 흔적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시신과 땅 곳곳에 묻어있는, 검고 끈적끈적한 기름 같은 탁기의 잔향이 보였다. 그것은 생명체의 피가 아니었다. 악귀의 몸뚱어리를 이루는, 원념의 찌꺼기였다. 그는 공기 중에 떠도는 희미한 메아리를 느꼈다. 희생자들의 마지막 공포와, 그들을 덮쳤던 압도적인 살의. 그리고 그 살의의 근원에 담긴, 수백 년 묵은 탐욕과 배신, 억울한 죽음의 기억들.

 

가람은 눈을 뜨고, 싸늘하게 식은 고갯길을 둘러보았다.

 

"짐승이 아니군."

 

그의 칠흑 같은 털이, 분노에 반응하여 바늘처럼 곤두섰다.

 

"네놈은, 수백 년간 이 땅에 쌓인 인간의 탐욕을 먹고 자란, 원한의 망령일 뿐이다."

 

그의 불꽃 같은 눈이, 숲의 가장 깊은 어둠을 향했다.

 

"사냥 시간이다.“

 

* * *

 

그림자의 탄생: 흑호(黑虎) 산채의 비극

 

이야기는 고려가 거란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혼란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정의 힘이 북방의 험준한 산맥까지 미치지 못하던 시절, 낭림령은 법보다 칼이 가까운 무법천지였다. 그리고 그 무법지대의 왕은, '흑호(黑虎)'라 불리는 사내와 그가 이끄는 산적 무리였다.

 

흑호는 잔인했지만, 동시에 비범한 자였다. 그는 낭림령의 모든 지형지물을 손바닥처럼 꿰고 있었고, 그의 지휘 아래 산적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비단길을 오가는 상단들을 귀신같이 약탈했다. 수많은 토벌군이 그를 잡으려 했지만, 번번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낭림령 아래 고을의 부임해 온 젊고 야심 넘치는 성주(城主), 그런 흑호가 눈엣가시였다. 그는 흑호를 토벌하여 명성을 얻고 싶었지만, 동시에 흑호의 산채에 쌓여있다는 막대한 보물을 탐내고 있었다.

 

결국, 성주는 꾀를 내어 흑호에게 밀사를 보냈다.

 

"흑호 대장. 성주께서 은밀한 제안을 하셨소. 조정에 반기를 든 '서경 상단', 막대한 군자금을 싣고 다음 달 보름, 이 고개를 넘을 것이오. 대장의 부하들과 우리 군사들이 힘을 합쳐 그들을 치면, 재물의 절반과 함께, 대장과 부하 전원의 죄를 사면해주시겠다고 하셨소."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평생을 산에서 짐승처럼 살아온 산적들에게, 죄를 씻고 양지에서 떳떳하게 살아갈 기회였다. 흑호는 성주의 탐욕을 의심했지만, '사면'이라는 달콤한 말에 결국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음 달 보름, 달빛이 핏빛처럼 붉은 밤. 흑호의 산적들은 성주가 보낸 군사들과 함께 서경 상단을 기습했다. 전투는 처절했다. 비단과 약재는 피로 물들었고, 상인들의 비명은 낭림령의 밤을 찢었다. 마침내, 흑호는 승리를 거두고, 약속된 재물을 챙겨 그들의 소굴인 '흑호 동굴'로 향했다. 그곳에서 성주와 만나, 죄의 사면을 약속받기로 한 것이다.

 

흑호 동굴은, 그들이 수십 년간 약탈한 재물이 산처럼 쌓여있는 거대한 동굴이었다. 흑호와 그의 부하들은 피 묻은 갑옷을 입은 채, 보물 더미 위에서 술을 마시며 승리를 자축하고 있었다. 곧 성주의 군사들이 도착하면, 이 지긋지긋한 산적 생활도 끝이었다.

 

"이제 우리도 사람답게 살 수 있다!"

"한양에 가서 큰 기와집을 사자!"

 

그들의 기대에 찬 환호성이 동굴을 울릴 때였다.

 

'쿠르르릉!'

 

갑자기, 동굴의 유일한 입구가 거대한 바위들로 막히기 시작했다. 성주의 군사들이, 밖에서 굴렸음이 분명했다. 순식간에 동굴 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어둠에 휩싸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성주 놈이! 우리를 속였구나!"

 

산적들의 환호성은,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절규로 바뀌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바위를 밀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동굴 밖에서는, 성주와 군사들의 희미한 비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들은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수십 년간 모아온, 피 묻은 황금과 비단 더미 위에서.

 

그날부터, 흑호 동굴은 생지옥으로 변했다. 처음 며칠은 서로를 의지하며 출구를 찾으려 애썼지만, 굶주림과 어둠은 인간의 이성을 빠르게 갉아먹었다. 그들은 얼마 남지 않은 식량을 두고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고, 황금을 지키기 위해 동료를 의심했다.

 

마지막 순간, 홀로 살아남은 흑호는, 주변에 널브러진 동료들의 시신과, 이제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보물 더미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며, 자신의 피로 동굴 벽에 마지막 저주를 새겼다.

 

"나의 원한은 이 산에 깃들고, 나의 탐욕은 이 어둠에 머물 것이다! 빛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우리의 혼은, 영원히 이 고개를 떠돌며, 우리처럼 재물을 탐하는 모든 자들을 찢어발길 것이다! 우리의 굶주림은, 그들의 피로 채워질 것이다!"

 

그것이 흑호 산채의 마지막이었다. 그들의 원한과 탐욕, 배신당한 분노는, 외부로 나가지 못한 채 동굴 안에, 낭림령의 땅속 깊은 곳에 거대한 '증오의 탁기' 웅덩이가 되어 수백 년간 썩어가기 시작했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흑호 동굴의 탁기는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낭림령을 오가는 수많은 상인들과 나그네들이 남기고 간 작은 '욕망''시기', '불안'의 메아리들이, 그 잠든 탁기에게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마침내, 탁기는 하나의 거대한 의지를 가진 존재, 악귀(惡鬼)로 깨어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 악귀는, 정상적인 영물처럼 자신의 형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의 영혼은, 빛이 완전히 차단된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오직 증오와 탐욕만을 먹고 응축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존재'했지만, '형체'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악귀가 마침내 동굴 밖으로 기어 나왔을 때, 그것은 살과 뼈를 가진 짐승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흑호의 원한이, 산적들의 탐욕이, 그리고 수백 년 묵은 낭림령의 어둠 그 자체가, 하나의 의지를 가지고 뭉쳐진, '살아있는 그림자'였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생기는 법. 하지만 그놈은 빛을 부정하고, 빛 속에서 태어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놈은 스스로가 그림자이면서, 동시에 어떤 그림자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기이한 존재가 된 것이다. 칼과 창이 그놈의 몸을 통과하는 것은, 애초에 벨 수 있는 육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림자 없는 짐승', 그렇게 낭림령의 가장 어두운 비극 속에서 태어난, 탐욕의 망령이었다. 그리고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살아있는 인간의 재물 냄새와, 그들의 공포의 메아리를 맡고, 굶주린 첫 사냥을 시작한 것이다.

 

* * *

 

달빛이,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낭림령의 참상 위로 차갑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가람은 피와 악취로 물든 고갯길 한가운데에, 산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의 일곱 번째 꼬리, '분노의 꼬리'를 조율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적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땅에 깃든 수백 년 묵은 원념의 주파수를 정확히 찾아내기 위한, 정밀한 음차(音叉)와도 같았다.

 

'왔구나.'

 

숲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바람도, 벌레도, 나뭇잎 스치는 소리마저도. 그 완전한 정적 속에서, 숲의 가장 깊은 그림자들이, 마치 검은 강물처럼 한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뛰어오거나 달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스며 나오고, 솟아나고, 응축되어, 마침내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한 '어둠의 구멍'이 되었다.

 

'그림자 없는 짐승'.

 

달빛 아래에서도, 그것은 어떤 그림자도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것 자신이,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탐욕의 망령."

 

가람이, 짐승이라기보다는 '현상'에 가까운 그것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네놈의 사냥은, 여기까지다."

 

악귀는 대답 대신, 수백 명의 산적들이 내지르는 듯한, 원한과 탐욕이 뒤섞인 비명 없는 비명을 토해냈다.

 

비단황금죽여라내 것이다!

 

그것은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닌, 영혼을 직접 할퀴는 사념의 폭풍이었다.

 

악귀가 먼저 움직였다.

 

그 형체의 일부가, 채찍처럼 길고 날카롭게 변하며 가람을 덮쳤다. 소리도, 바람을 가르는 소리조차 없는, 완전한 무음(無音)의 공격.

 

가람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땅을 박차고, 포탄처럼 정면으로 돌진했다. 그는 자신의 양손에, 붉고 뜨거운 영력(靈力)을 불꽃처럼 피워 올렸다. 구미호의 육신은, 그 자체가 신물(神物)이었다.

 

'카아앙-!'

 

가람의 불꽃 튀는 발톱과, 악귀의 어둠의 촉수가 허공에서 격돌했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불과 물이 만나, 서로를 증발시키려는 듯한 끔찍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검붉은 불꽃과 검은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 싸움은, 물리 법칙이 통하지 않는 영역의 것이었다.

 

악귀가 뿜어내는 어둠의 기운은, 닿는 모든 것의 생명력을 빼앗았다. 그것이 스쳐 지나간 바위에는 검은 이끼가 피었고, 나무는 순식간에 잎을 떨구고 말라 비틀어졌다.

 

가람의 일격은, 순수한 영력의 폭발이었다. 그의 주먹이 땅을 스치자, 흙이 녹아 유리처럼 변했고, 그의 포효는 악귀의 어둠을 잠시나마 흩어지게 할 만큼 강력했다.

 

수십 번의 공방이, 찰나와 같은 시간 속에 오갔다. 칠흑 같은 가람의 털과, 살아 움직이는 어둠 덩어리가 뒤엉켜, 무엇이 실체이고 무엇이 허상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격렬한 춤을 추었다.

 

악귀의 발톱이 가람의 어깨를 스쳤다. 살이 찢어지는 대신, 그의 영혼에 직접 상처를 입히는 듯한, 얼음 같은 고통이 퍼져나갔다.

 

가람 역시, 포효와 함께 악귀의 몸통을 발톱으로 깊숙이 할퀴었다. 악귀의 형체가 크게 일그러지며, 그 안에서 수십 개의 비명지르는 얼굴들이 고통스럽게 꿈틀거렸다.

 

가람은 이 싸움이 길어질수록, 이 땅 전체가 돌이킬 수 없이 오염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기로 결심했다.

 

그는 악귀의 다음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둠의 촉수가 자신의 왼쪽 팔을 꿰뚫는 것을 허용했다. 살을 파고드는 영적인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대신, 그는 그 순간을 이용해, 악귀의 실체 없는 몸뚱어리를 자신의 팔로 붙잡아, 강력하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힘과 체중, 영력을 실어, 악귀를 땅바닥에 그대로 내리꽂았다!

 

'콰르르르릉-!'

 

고갯길의 땅이, 거대한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박살 나며, 작은 분화구가 생겨났다. 가람은 피를 흘리는 팔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그림자를 땅에 속박했다. 악귀는 연기처럼 흩어지려 했지만, 가람의 신성한 육신과 영력이, 마치 거대한 쇠말뚝처럼 그 본질을 땅에 붙잡아두고 있었다.

 

"이제, 끝이다."

 

가람은 왼쪽 팔의 상처에 고통을 느끼면서도 오른손으로 허리춤에 찬 칼을 뽑아 들었다.

 

'멸악검(滅惡劍)'.

 

별의 심장에서 단조되었다는, 구미호 일족의 수호자에게만 전해지는 신검(神劍)이었다.

 

칼이 칼집에서 뽑혀 나오는 순간, 칠흑 같은 밤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칼날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악의를 베어낼 수 있는, 순수한 '법칙' 그 자체가, 서슬 퍼런 칼날의 형태로 현신한 듯했다.

 

그는 자신의 아홉 번째 꼬리, 구미호 일족의 최가의 꼬리의 힘인 '단절()'의 힘을 개방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꼬리에서부터 흘러나온, 모든 인과를 끊어낼 수 있는 절대적인 기운이, 그의 팔을 타고 흘러 멸악검의 칼날 위로 모여들었다. 칼날이, 다이아몬드처럼 차갑고 눈부신 빛으로 울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더 이상 악귀의 흉측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악귀의 심장부에서부터 뻗어 나와, 이 피로 물든 고갯길의 땅과, 저 멀리 산속 깊은 곳에 묻힌 '흑호 동굴'의 보물과 유골에 연결된, 수백 가닥의 검고 질긴 '영적인 탯줄'이 보였다.

 

저것이 바로, 이 망령을 수백 년간 이 땅에 묶어두고, 그 굶주림을 채워온 악업(惡業)의 사슬이었다.

 

"악업의 사슬을, 여기서 끊는다!"

 

가람은 포효하며, 빛나는 칼날을, 발버둥 치는 그림자의 심장을 향해 깊숙이 찔러 넣었다.

 

'서걱'.

 

어떤 폭발도, 굉음도 없었다. 오직, 아주 잘 드는 가위로 낡은 실을 끊는 듯한, 작지만 절대적인 단절의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악귀의 입에서 마지막 비명이 터져 나왔다.

 

"키에에에엑-!"

 

하지만 그 비명은 분노나 고통이 아닌, 수백 년의 원한에서 마침내 해방되는, 길고도 서글픈 절규였다.

 

그림자 같던 형체는, 더 이상 어둠이 아닌, 수백 개의 슬픔 어린 잿빛 불씨가 되어 떠올랐다. 원한을 잃어버린 흑호와 그의 부하들의 순수한 영혼들이었다. 그 불씨들은 잠시 밤하늘을 수놓다가, 이내 새벽안개처럼 고요히 흩어져,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낭림령을 짓누르던 살을 에는 한기와 악취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상처 입었지만 평온해진, 산의 고요한 숨소리만이 남았다.

 

가람은 상처 입은 팔을 부여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멸악검을 칼집에 넣으며, 차갑게 식은 산길을 말없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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