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쓰기

구미호_마음정화사_04

pitagy 2025. 8. 1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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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의 노래 02 _ 미류, 거울 속의 미궁

 

피고 지는 꽃, 매향(梅香)의 슬픈 노래

 

개경 제일의 기루 '월영각(月影閣)'.

 

그곳에 열다섯의 매향이 처음 들어왔을 때, 기루의 대모(代母)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저 아이는 월영각의 격을, 아니 개경 전체의 격을 바꿔놓을 재능을 가진 아이라는 것을.

 

매향은 그저 아름답기만 한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천재였다. ()와 서(), ()에 두루 능했고, 특히 가야금 선율은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일 만큼 신묘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어린 나이에, 기루의 가장 잔인한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밤새 고뇌하여 지은 시 한 수는, 권세가들의 고상한 칭찬 한마디를 얻을 뿐이었지만, 작게 핀 매화 같은 그녀의 입술이 짓는 수줍은 미소 한 번은, 비단옷과 값비싼 옥 노리개를 그녀의 발치에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스승이자, 한때 월영각 최고의 기생이었던 퇴기(退妓) 월산(月山), 어느 날 밤 거울 속 자신의 희끗희끗한 귀밑머리를 보며 나직이 말했다.

 

"매향아, 똑똑히 새겨듣거라.“

 

", 스승님.“

 

"사내들은 너의 재주를 칭찬하고 너의 시를 사랑한다 말하겠지만, 그들의 욕망이 진정으로 향하는 곳은, 오직 너의 젊음과 아름다움뿐이다. 우리는 꽃과 같아, 활짝 피었을 때 사랑받고, 시들기 시작하면 가차 없이 꺾여 버려지는 존재지. 너의 가야금 실력은 너를 늙지 않게 해주지 않지만, 너의 아름다움은 오늘 밤 너를 이 기루의 주인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명심하거라. 재주는 시들지 않는 법을, 아름다움은 시드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매향은 그 말을 뼛속 깊이 새겼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아름다움'을 위해 갈고 닦았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

 

눈썹을 그리는 법, 웃을 때 살짝 휘어지는 눈매의 각도, 차를 따를 때 드러나는 하얀 손목의 선. 그녀의 모든 움직임은 한 폭의 그림이 되었고, 그녀의 모든 침묵은 한 편의 시가 되었다.

 

이내, 개경의 모든 남성들이 그녀의 발치에 엎드렸다. 막강한 권력을 쥔 재상도, 거부(巨富) 상인도, 천재라 불리는 시인도, 그녀와 하룻밤 대화를 나누기 위해 월영각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매향은 월영각의 봄이자, 개경의 봄 그 자체였다.

 

시간은 흐르는 물과 같았다.

 

열 번의 매화가 피고 지는 사이, 매향은 스물다섯이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갓 피어난 꽃의 풋풋함 대신, 만개한 꽃의 농염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균열은, 그녀를 가장 열렬히 총애하던 이조판서 대감과의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그날도 매향은 혼을 담아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었다. 판서 대감은 흡족한 미소로 그녀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그때, 갓 열여섯 살이 된 신참 기생, '애란'이 차를 올리기 위해 방으로 들어왔다. 수줍음에 발그레해진 뺨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맑은 눈동자.

 

판서 대감의 시선이, 아주 잠시, 그러나 분명하게 애란에게로 향했다. 그는 가야금 소리에는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연주가 끝나자, 판서 대감이 말했다.

 

"허허, 과연 매향이로구나. 너의 가야금 솜씨는 이제 완숙의 경지에 이르렀어. 진정한 대가(大家)의 솜씨다."

 

'대가(大家)'.

 

그 칭찬이, 매향의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것은 그녀의 예술에 대한 찬사였지만, 동시에 그녀의 나이와 세월에 대한 확인 사살이기도 했다. 사내는 더 이상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원숙함'을 칭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애란을 돌아보며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 이른 봄에 막 피어난 살구꽃 같구나."

 

그 순간, 매향은 보았다. 판서의 눈에 서린, 새로운 꽃을 향한 노골적인 욕망과, 자신을 향한 익숙하고 편안한 감탄을. 그녀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월산의 쓸쓸한 뒷모습과, 월영각에 새로 들어오는 수많은 어린 기생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의 발밑에서, 그녀가 서 있던 화려한 세계가 아주 조금, 그러나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판서 대감의 발길은 뜸해졌다. 다른 권세가들 역시, 점차 애란과 같은 어리고 새로운 기생들을 찾기 시작했다.

 

매향의 방을 찾는 이들은, 이제 그녀의 젊음을 탐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녀의 명성을 빌리고자 하는 늙은 시인들이나, 그녀의 연주를 진정으로 아끼는 몇몇 예술가들뿐이었다.

 

매향은 미쳐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매일 밤, 자신의 청동 거울 앞에 앉아, 눈가의 아주 희미한 잔주름과, 아주 조금 탄력을 잃은 턱선을 보며 절망했다. 한때 그녀의 가장 큰 무기였던 가야금은, 이제 그녀의 늙어감을 증명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대가의 솜씨'라는 칭찬은, '너는 이제 늙었다'는 저주와도 같았다.

 

'아니야, 나는 아직 아름다워. 나는 시들지 않았어. 단지 저들이, 새로운 것에 눈이 멀었을 뿐이야.'

 

그녀의 집착이 광기에 가까워질 무렵, 서역에서 왔다는 한 신비한 상인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는 그녀의 소문을 들었다며, 비단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마님. 세상의 모든 거울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만을 비추어,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요. 하지만 이 거울은 다릅니다."

 

상자가 열리자, 그 안에는 달빛처럼 은은한 빛을 내뿜는, 아주 오래된 청동 거울이 들어 있었다.

 

"'월광경(月光鏡)', 진실이 아닌, '간절한 소망'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매향은 홀린 듯 거울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털어 그 거울을 샀다.

 

그날 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거울을 자신의 얼굴에 비추었다. 거울 속에 비친 것은, 스물다섯의 지친 매향이 아니었다. 주름 하나 없는 팽팽한 뺨, 세상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빛나던 열여덟 살의, 가장 눈부셨던 시절의 매향이 미소 짓고 있었다.

 

"아아!"

 

그것은 지독한 독()이자, 달콤한 구원이었다.

 

그날 이후, 매향은 자신의 방에 칩거했다. 그녀는 더 이상 손님을 받지도, 가야금을 타지도 않았다. 그녀는 하루 종일 거울 속의 자신과 대화하며, 영원한 아름다움의 환상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그녀의 그릇된 욕망과, 세월을 향한 부정,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그녀의 방을 중심으로 짙은 '허영과 공허의 탁기'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탁기의 심장이 된 '월광경', 이제 그녀뿐만 아니라, 그 거울을 들여다보는 모든 이들의 영혼을 사로잡는, 무서운 '꿈의 미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거울의 미궁: 황 대감의 마지막 연회

 

() 대감은 한때 개경에서 내로라하는 권세가였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 앞에 그의 권세도, 젊음도 빛이 바래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젊고 총명한 신진 사대부들이 치고 올라왔고, 밤이면 쑤시는 허리와 시큰거리는 무릎이 자신이 더 이상 젊지 않음을 상기시켰다.

 

그럴 때마다 그는 '월영각'의 매향을 떠올렸다. 젊은 시절, 그가 가장 아꼈던 기생. 그녀의 아름다움과 칭송은, 곧 자신의 권세와 남성성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는 칩거에 들어간 매향이 그립다기보다, 그녀를 품에 안았던 젊고 강했던 시절의 자기 자신이 그리웠다.

 

'매향이는 여전히 아름다울까? 그녀를 보면, 나도 잠시나마 그때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날 밤, 그는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월영각의 가장 깊숙한 곳, 매향의 방으로 향했다. 하인들의 만류도 뿌리친 채였다.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잠겨있지는 않았다.

 

문을 열자, 먼지와 함께 서늘하고 기묘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방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어지러웠지만, 단 한 사람, 창가에 앉은 매향만은 비현실적으로 완벽했다. 그녀는 촛불 아래,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앉아, 자신의 앞에 놓인 청동 거울을 응시하고 있었다.

 

"매향아."

 

황 대감이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마치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 같았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보게, 매향아! 내가 왔네!"

 

그는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어깨 너머, 그녀가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그 신비로운 청동 거울의 표면에 먼저 닿고 말았다.

 

'이게 대체'

 

황 대감은 숨을 멈췄다. 거울 속에 비친 것은, 늙고 주름진 자신의 얼굴이 아니었다. 삼십 대 중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던 젊은 시절의 자기 자신이, 놀란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순간, 그의 등 뒤에 있던 매향의 어지러운 방이, 마치 물에 번지는 먹물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대신, 그의 눈앞에는 십수 년 전,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월영각의 화려한 연회장이 펼쳐졌다.

 

"대감, 오셨사옵니까!"

 

자신을 조정에서 껄끄럽게 대하던 젊은 관리들이, 그의 앞에 엎드려 아첨을 떨고 있었다.

 

"대감의 혜안 덕분에, 나라의 근심이 사라졌사옵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늙고 검버섯이 핀 손이 아닌, 힘줄이 팽팽하게 솟아오른, 강하고 젊은 손이었다. 쑤시던 허리의 통증은 사라지고, 온몸에 활기가 넘쳤다.

 

"황 대감."

 

꿈결같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열여덟, 가장 눈부셨던 시절의 매향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현실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오직 자신만을 향한 순수한 연정과 흠모가 가득했다.

 

"대감.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세상 사내들이 모두 저를 원한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 이는, 제 연주에 담긴 혼을 알아주시는 이는, 이 세상에 오직 대감 한 분뿐이온데."

 

매향이 그의 품에 부드럽게 안겼다.

 

현실의 불안감, 늙어감에 대한 초조함, 젊은 경쟁자들에 대한 질투. 그 모든 것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곳은 완벽했다. 자신이 원했던 모든 것이 이루어진, 완벽한 세계였다.

 

그는 어렴풋이, 이것이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의심은, 거울 속 매향이 건네는 달콤한 술 한 잔에, 너무나도 쉽게 녹아 없어졌다.

 

'그래이게 현실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나의 세상이다.'

 

그는 기꺼이, 그 완벽한 꿈의 주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현실의 먼지 쌓인 매향의 방.

 

매향은 여전히 거울 속의 자신과 속삭이며 미소 짓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황 대감이 미동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공허하고 바보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고, 초점 없는 눈은 거울 표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입가에서는 가는 침 한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꿈의 미궁은, 그를 받아들인 대가로 그의 정기(精氣)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거울 속 그의 영혼은 젊음과 권력을 만끽하고 있었지만, 현실의 그의 육신은 빠른 속도로 시들어가고 있었다.

 

"대감! 황 대감님!"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는 황 대감을 찾아, 그의 충직한 하인이 마침내 매향의 방으로 찾아 왔다. 그는 방 안의 끔찍한 광경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아름다운 허상에 취해 있는 기녀와, 살아있는 송장처럼 변해버린 자신의 주인.

 

하인은 필사적으로 황 대감을 흔들었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그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거울 속에만 존재하는 자신의 완벽한 세계를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하인은 겁에 질려 방을 뛰쳐나갔다.

 

그날 이후, 월영각 매향의 방은 '사내의 혼을 빼앗는 마경(魔鏡)이 있는 곳'으로 소문이 퍼져나갔다. 몇몇 호기로운 사내들이나, 매향을 구하겠다며 나선 이들이 그 방에 들어갔지만, 그들 역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가장 깊은 욕망어떤 이는 막대한 부를, 어떤 이는 일생의 명예를, 어떤 이는 죽은 연인과의 재회을 마주하고는, 황 대감처럼 텅 빈 껍데기가 되어 나올 뿐이었다.

 

거울의 요력은, 희생자들의 욕망을 양분 삼아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매향의 방을 중심으로 한 '허영과 공허의 탁기'는 이제 월영각 전체를 뒤덮을 만큼 짙어지고 있었다.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한 미류가 월영각을 찾았다. 붉은빛이 감도는 머리칼에 장난기 가득한 눈매를 가진 그녀는, 인간의 꿈과 욕망을 다루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였다.

 

"어머, 저렇게 노골적인 욕망의 탁기라니. 너무 맛없어 보이는걸."

 

미류는 코를 킁킁거리며 매향의 방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매향이 뿜어내는 '허영과 집착의 탁기'로 가득했다. 미류가 거울을 들여다보자, 거울 표면이 물결치며 그녀를 안으로 빨아들였다.

 

매향의 청동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은, 마치 차가운 달빛으로 이루어진 폭포 속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잠시 동안의 아득한 부유감 끝에, 미류는 사뿐히 어느 공간에 발을 디뎠다.

 

그곳은 월영각의 그 어떤 방보다도 화려하고 긴 회랑이었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회랑의 양쪽 벽은 온통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청동 거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미류가 한 걸음 내딛자, 수백 개의 거울 속 미류가 동시에 움직였다.

 

"어머, 내 팬이 이렇게나 많았나?"

 

미류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거울 하나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것은, 지금의 자신이 아니었다. 눈가에 아주 희미한 주름이 잡힌, 지금보다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미류가, 경멸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옆의 거울에는 머리칼이 푸석해진 미류가, 또 다른 거울에는 피부의 탄력을 잃은 미류가 비치고 있었다.

 

속닥속닥

 

거울들 속에서, 수백 명의 늙어가는 자신들이 그녀를 향해 속삭이기 시작했다.

 

', 너도 결국 시들고 있잖아.'

 

'그 아름다움이 영원할 것 같아?'

 

'이제 아무도 너를 원하지 않을 거야.'

 

이것이 미궁의 첫 번째 관문. 세월의 흐름을 부정하고, 늙어감을 혐오하는 매향의 불안이 만들어낸 '쇠락의 회랑'이었다. 평범한 이라면 이 자기혐오의 속삭임에 정신이 무너졌겠지만, 미류는 그저 하품을 한번 할 뿐이었다.

 

"지루해라. 난 늙어도 예쁠 거거든?"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아홉 꼬리 중, 가장 붉고 매혹적인 기운을 뿜어내는 '욕망()의 꼬리' 나침반처럼 사용했다.

 

그녀의 붉은 꼬리가 부드럽게 빛나며, 회랑의 가장 깊숙한 곳, 이 미궁의 주인이자 가장 강력한 욕망의 근원인 '매향의 영혼'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부드럽게 그쪽으로 휘었다.

 

", 그럼 파티장으로 가볼까."

 

미류는 수백 개의 저주를 무시한 채, 꼬리가 이끄는 방향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회랑 끝의 문을 열자, 화려한 연회장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곳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기녀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분명 아름다운 비단옷을 입고 있었지만, 얼굴은 시기와 질투로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길고 붉은 손톱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들은 매향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자신보다 어리고 아름다운 기생들에 대한 공포와 질투가 만들어낸 '질투의 괴물'들이었다.

 

괴물들은 미류를 발견하자, 일제히 춤을 멈추고 그녀를 둘러쌌다. 그들은 물리적인 공격을 하는 대신, 독이 든 꿀 같은 목소리로 그녀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어머, 저기 새로운 꽃이 왔네. 하지만 금방 시들겠지."

"판서 대감께서는, 이제 나만 찾으시는데. 넌 어쩌니?"

"네가 아무리 뛰어나도, 젊음은 이길 수 없어."

 

그들의 속삭임은, 매향이 평생에 걸쳐 들었던, 그리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던 불안의 파편들이었다. 미류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시끄러워. 너희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잖아."

 

미류는 싸우는 대신, 자신의 또 다른 꼬리, 짜릿하고 활기찬 주황빛의 '즐거움()의 꼬리'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그녀의 꼬리가 흩뿌리는 주황빛 가루가, 괴물들의 주변에 내려앉는 순간, 그들의 눈앞에 각자가 가장 원하는 환상이 펼쳐졌다.

 

어떤 괴물의 눈앞에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값비싼 비취 반지를 건네는 젊은 대감의 환상이.

어떤 괴물의 눈앞에는, 자신의 춤사위에 반해, 수많은 사람들이 돈과 비단을 비처럼 뿌리는 환상이.

또 어떤 괴물의 눈앞에는, 라이벌 기생이 무대에서 실수를 하여 망신을 당하는, 통쾌한 환상이 펼쳐졌다.

 

"아아!"

 

괴물들은 각자의 완벽한 즐거움 속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들의 일그러졌던 얼굴은 황홀한 미소로 바뀌었고, 더 이상 미류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질투의 괴물들은, 그렇게 각자의 행복한 꿈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미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꿈꾸는 괴물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갔다.

 

연회장을 지나자, 미궁은 그 본색을 드러냈다. 화려했던 풍경은 사라지고, 축축하고 어두운 동굴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벽은 마치 생기를 잃고 주름진 피부 같았고, 바닥에는 한 움큼씩 빠진, 윤기 없는 머리카락들이 널려 있었다. 자신의 늙어감을 부정하는 매향의 공포가, 미궁의 풍경을 흉측하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동굴의 중앙에는, 거대한 단 하나의 괴물이 길을 막고 있었다.

 

그것은 이전의 괴물들과는 달랐다. 형체조차 불분명한, 수많은 늙은 몸뚱이들이 억지로 뭉쳐진 듯한 '쇠락의 괴물'.

 

그 괴물은 미궁의 침입자를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완벽한 세계에 생긴 흠집을 바라보듯, 차갑고 오만한 표정으로 미류를 쏘아보았다. 이곳에서 그녀는 신()이었고, 창조주였다.

 

"감히 나의 정원에 발을 들인 것이 누구냐? 내 영원한 아름다움을 시기하여 훔치러 온, 또 다른 망령이냐?"

 

매향의 목소리는 아름다웠지만, 그 안에는 자신 외의 모든 것을 경멸하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미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영원한 아름다움? 글쎄. 내 코에는 먼지 냄새와, 필사적인 거짓말 냄새밖에 안 나는걸. 여긴 정원이 아니라, 네가 스스로를 가둔 예쁜 무덤이야, 매향."

 

"닥쳐라!"

 

매향이 노호(怒號)하자, 미궁 전체가 그녀의 분노에 반응하듯 울렸다. 그녀는 자신의 꿈의 힘을 이용해, 미류를 굴복시키려 했다. 미류의 눈앞에, 수많은 잘생긴 사내들이 나타나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온갖 금은보화가 산처럼 쌓이는 환상이 펼쳐졌다. 매향이 평생을 갈망했던 것들.

 

하지만 미류는 그저 손가락을 한번 '튕기는' 것만으로, 모든 환상을 먼지처럼 흩어버렸다.

 

"어머, 미안. 그런 시시한 욕망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어서."

 

미류는 매향의 힘이 자신에게는 통하지 않음을 증명해 보였다. 그녀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니었다. 미류는 성큼성큼 걸어가, 경계심을 세우는 매향의 옆에 스스럼없이 앉았다.

 

"그래, 네 말대로 넌 지금 가장 아름다워. 하지만 이 아름다움은, 상자 속에 박제된 나비와 같아. 화려하지만, 날갯짓하지 않지. 살아있지 않으니까."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영원히?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하룻밤을, 영원히 반복하면서? 재미없잖아. 내가 더 재미있는 걸 보여줄까?"

 

미류는 더 이상 매향의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즐거움()의 꼬리'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그러자, 매향의 완벽했던 정원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영원히 밤하늘에 떠 있던 달이 서서히 지고, 따스한 아침의 햇살이 비춰들기 시작했다. 화려했던 매화는 우아한 가을 국화로 변했고, 공기 중에는 서늘하지만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얼어붙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매향의 눈앞, 거울처럼 맑았던 연못 수면에,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 모습은, 백발이 서리처럼 하얗게 내렸지만, 그 눈빛은 수십 년의 세월과 지혜가 빚어낸 보석처럼 깊고 총명했다. 가야금을 쥔 손가락은 주름졌지만, 그 우아한 손짓 하나하나는 흉내 낼 수 없는 대가(大家)의 품격이 흘렀다.

 

환상 속에서, '늙은 매향'은 월영각의 가장 큰 대청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발치에는, 갓 기루에 들어온 어린 기녀들이 수십 명 앉아, 숨을 죽인 채 그녀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환상 속의 늙은 매향이, 깊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리보다 중요한 것은, 소리와 소리 사이의 침묵, 그 여백이다. 너희는 그 여백에, 각자의 혼()을 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린 기녀들은 경외와 존경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젊은 사내들의 눈에 서린 욕망의 빛 따위는 없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예술가를 향한, 순수한 흠모의 빛만이 가득했다.

 

미류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열여덟의 매향에게 속삭였다.

 

", 저것도 꽤 즐거워 보이지 않아? 젊음이라는 하나의 쾌락에만 매달리기엔, 세상엔 재밌는 게 너무 많거든. 사내의 욕망을 받는 즐거움도 있지만, 저 아이들의 존경을 받는 즐거움도 있고, 무엇보다누군가를 키워내는 즐거움도 있지."

 

미류는 매향에게, '새로운 욕망'을 제시한 것이다. 덧없는 젊음이 아니라, 시들지 않는 예술과 존경받는 스승이 되는 즐거움.

 

거울 속, 열여덟 살 매향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는 환상 속의 늙고 위엄 있는 자신과, 지금 이 완벽한 허상 속에 갇힌 자신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거울 밖 진짜 자신의 모습을 갈망하게 되었다. 주름지고 늙었지만, 저렇게 살아 숨 쉬며, 누군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해 줄 수 있는, 살아있는 미래를.

 

그녀의 그 '살고 싶다'는 간절한 욕망이, 미궁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완벽했던 정원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영원할 것 같던 달빛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선택은 네 몫이야, 매향. 이 썩어가는 무덤에 남을지, 아니면 저 새로운 정원으로 나아갈지."

 

미류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미궁 전체가 빛의 파편이 되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미궁 전체가 흔들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류는 밖으로 튕겨져 나왔고, 매향의 손에 들려 있던 청동 거울에 금이 가며 산산조각 났다. 폐인이 되었던 사내들도 모두 정신을 차렸다. 며칠 후, 월영각에서는 백발의 기녀 매향이 다시 거문고를 잡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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