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쓰기

구미호_마음정화사_06

pitagy 2025. 8. 18.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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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의 노래 04 _ 무감(無感)의 안개와 아홉 꼬리의 교향곡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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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솜, 미류, 가람. 각자는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였지만, 그들조차 속수무책인 재앙이 찾아왔다. 당시 가장 번화했던 대도시, '위례(慰禮)''무감(無感)의 안개'가 피어오른 것이다.

 

재앙은 소리 없이, 새벽녘의 물안개처럼 찾아왔다.

 

안개는 앞을 가릴 만큼 짙지도 않았고, 옷을 적실 만큼 축축하지도 않았다. 그저 세상의 모든 색채를 한 꺼풀 벗겨낸 듯, 잿빛 필터를 씌운 것처럼 얇고 투명하게 도시 전체를 감쌌다. 이상하게도, 그 안개 속에서는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멀게만 느껴졌다.

 

그날 아침, 위례의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났지만, 무언가 달라졌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이 바로 재앙의 첫 번째 증상이었다.

 

#1. 침묵의 저잣거리

 

언제나 활기찬 함성과 흥정 소리로 가득했던 저잣거리는, 기이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생선 장수는 펄떡이는 물고기를 들어 보였지만, "싱싱한 고등어 사려!" 하고 외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무표정하게 생선을 들어 보이고, 값을 말하고, 돈을 받고, 물고기를 내어줄 뿐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침을 여는 활기도, 손님을 끄는 흥도 담겨 있지 않았다.

 

손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떡을 사는 할머니는 손주에게 줄 꿀떡을 사면서도 "덤으로 하나만 더 주시오."라는 정겨운 말을 건네지 않았다. 비단 가게 주인은 새로 들어온 화려한 비단을 보면서도 감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필요한 물건을 사고, 정해진 값을 치르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뿐이었다.

 

한 아이가, 아버지가 사준 엿을 땅에 떨어뜨렸다. 아이는 잠시 바닥에 떨어진 엿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울지 않았다. 떼를 쓰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버지의 손을 잡고 다시 걸어갈 뿐이었다. 아이의 눈에는 슬픔도, 아쉬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저잣거리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그곳에는 생기가 없었다. 오직 살아있는 송장들의, 목적 없는 행렬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2. 공허한 궁궐

 

재앙은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웅장한 궁궐의 용상에 앉은 왕의 얼굴에도 잿빛 권태가 서려 있었다.

 

"전하, 북방의 오랑캐들이 국경을 넘어와 노략질을 일삼고 있다 하옵니다. 군사를 보내 토벌해야 마땅할 줄로 아뢰오!"

 

총사령관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충심의 '분노'가 실려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외워 온 문장을 감정 없이 읊조리고 있을 뿐이었다.

 

왕은 그 보고를 들으며,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라."

 

그의 대답에는 어떤 고뇌도, 결단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사안 앞에서, 신하들은 논쟁하지 않았고, 왕은 번민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해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인형극과도 같았다.

 

후원에서는 궁중 악사들이 완벽한 기교로 아악(雅樂)을 연주하고 있었지만, 그 선율에는 어떤 감흥도 실려 있지 않아 공허한 소음처럼 들렸다. 무희들은 정확한 동작으로 춤을 추었지만, 그 춤사위에는 어떤 희열도, 슬픔도 담겨 있지 않았다.

 

가장 화려하고, 가장 강력한 자들이 모인 그곳은, 도시에서 가장 공허하고 텅 빈 공간이었다.

 

#3. 흐르지 않는 눈물

 

재앙의 가장 참혹한 모습은, 한 상갓집에서 드러났다.

 

평생을 인자하게 살아온 한 노모가 세상을 떠났다. 마당에는 조문객들이 앉아 있었고, 아들 내외는 상복을 입은 채 곡을 하고 있었다.

 

"아이고아이고"

 

하지만 그들의 곡소리에는 슬픔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들은 '상주라면 마땅히 슬퍼하며 곡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약속을, 기계적으로 이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지만, 눈물은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아들은 어머니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 평생을 자신을 위해 헌신했던 어머니의 따뜻한 얼굴. 그는 자신이 지금,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어떤 파문도 일지 않았다.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움도, 죄책감도,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조차,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은 그 어떤 고문보다도 더 끔찍한 공포였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신들의 눈에, 위례는 죽음의 도시처럼 보였다. 평소라면, 인간들의 희로애락이 만들어내는 수억 개의 '영혼의 메아리'가 안개처럼 피어올라야 할 도시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완전한 침묵. 모든 영혼의 활동이 멈춰버린, 거대한 무덤이었다.

 

위례는 죽은 자들의 도시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한,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린 자들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세 여우의 절망: 잿빛 안개 앞의 무력감

 

위례를 뒤덮은 잿빛 안개의 소식은, 여우구슬 골짜기에도 곧 전해졌다. 아란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녀의 가장 뛰어난 세 동료, 다솜, 미류, 가람을 인간 세상으로 보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능력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에 자신들이 해결하지 못할 영혼의 문제는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의 그 믿음은, 잿빛 도시의 침묵 앞에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치유사의 무력감: 다솜, 텅 빈 우물을 마주하다

 

치유사 다솜은, 슬픔이 가장 깊을 것이라 생각되는 곳, 바로 상갓집으로 향했다. 그는 며칠 전 어머니를 잃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했다는 그 아들의 곁에, 조용히 다가갔다.

 

'얼마나 깊은 슬픔이기에,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것일까. 내가 그 슬픔의 둑을 터뜨려주리라.'

 

다솜은 자신의 '슬픔의 꼬리()'를 풀어, 상주의 마음에 조심스럽게 공명했다. 그의 능력은, 상대의 슬픔이라는 우물에 함께 뛰어들어, 그 깊이를 헤아리고 바닥부터 치유하는 힘이었다.

 

하지만, 그의 영혼이 상주의 마음에 닿는 순간, 다솜은 경악했다.

 

그곳에는 우물이 없었다.

 

슬픔으로 가득 찬 깊은 우물이 아니라, 아예 바닥조차 없는, 텅 비고 건조한 심연만이 존재했다. 슬픔이 억눌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예, '슬픔'이라는 감정 자체가 지워져 있었다.

 

다솜은 당황하여, 자신의 '사랑의 꼬리()'에서 나오는 따스한 위로의 기운을 보내보았다. 하지만 그의 위로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아무런 반향 없이 공허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위로의 에너지가 머물거나, 뿌리내릴 감정의 토양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수가."

 

다솜은 뒷걸음질 쳤다. 그는 평생을, 상처 입은 영혼의 '상처'를 꿰매고 치료하는 의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는,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 심장 자체가 도려내어진 영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영혼을 구원했던 그 치유의 손이,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빈손일 뿐이었다.

 

몽상가의 악몽: 미류, 텅 빈 꿈 속을 헤매다

 

몽상가 미류는 꿈과 욕망이 가장 활발해야 할 곳, 젊은 예술가의 작업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 젊은 화가가, 텅 빈 캔버스 앞에서 며칠째 붓도 들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욕망이나 불안이, 아주 복잡한 미로를 만들어 놓았겠지. 길을 잃은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건, 내 전문이니까.'

 

미류는 자신만만하게, 잠든 화가의 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복잡한 미로나, 기괴한 괴물들을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마주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한 풍경이었다.

 

그곳은, 끝없이 펼쳐진 잿빛의 그 무엇이었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공간.

 

해도, 달도, 별도 없는 하늘 아래, 모래 한 톨, 바람 한 점 없는, 완벽한 무()의 공간.

 

화가의 꿈속 자아는, 그 무의 공간 한가운데에, 눈도 코도 입도 없는 회색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이게꿈이라고?"

 

미류는 당황하여, 자신의 '욕망의 꼬리()'를 흔들어, 화가가 가장 갈망할 법한 환상을 만들어내려 했다. 세상 모든 이들이 그의 그림에 찬사를 보내는 전시회장의 환상.

 

하지만 그녀가 만들어낸 환상은, 잿빛 공간에 닿는 순간, 마치 물에 번지는 잉크처럼 힘없이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욕망의 불꽃을 피워낼, '갈망'이라는 부싯돌 자체가 없었다. 그녀는 '즐거움의 꼬리()', 그림을 완성했을 때의 쾌감이라는 환상을 보여주려 했지만, 그 역시 잿빛 공기에 닿는 순간 먼지처럼 흩어졌다.

 

이곳은 꿈이 아니었다. 모든 꿈이 죽어버린, '꿈의 무덤'이었다.

 

미류는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녀는 평생을, 타인의 욕망과 꿈이라는 실을 가지고 노는 방직공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앞에는, 단 한 올의 실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베틀만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꿈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그녀의 붉은 머리칼이, 마치 생기를 잃은 듯 푸석하게 느껴졌다.

 

수호자의 좌절: 가람, 허공에 칼을 휘두르다.

 

수호자 가람은, 가장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이 모든 재앙을 일으키는 '근원', 즉 거대한 악귀나 저주의 핵이 도시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는 밤의 어둠을 틈타, 도시의 가장 어둡고 탁한 곳을 찾아다녔다.

 

그는 자신의 영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며, 적의 실체를 찾기 위해 도시 전체를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그의 감지기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모든 것이 걸렸다.

 

이 잿빛 안개는, 도시의 특정 지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왕의 궁궐에도, 백정의 집에도, 길가의 돌멩이 하나에도, 똑같은 농도로, 똑같은 무게로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공기 중에 퍼진 독가스와도 같이 모든 곳에 서려 있었다.

 

가람은 답답함에, 자신의 멸악검(滅惡劍)을 뽑아 들고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그의 칼날은 악귀의 형체를 베고, 저주의 사슬을 끊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칼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저 잿빛 안개를 갈랐다가 다시 합쳐지게 할 뿐이었다.

 

"크으으!"

 

가람은 분노의 포효를 터뜨렸다. 그는 평생을 악의와 싸워온 전사였다. 그의 힘은 파괴와 절단에 특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는, 베어야 할 적의 목도, 찔러야 할 적의 심장도 없었다.

 

그는 마치 안개를 베려는 검객과도 같았다. 자신의 압도적인 힘이,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무력감. 행동과 파괴를 숙명으로 타고난 그에게, 그것은 그 어떤 고통보다 더한 고문이었다.

 

패배, 그리고 귀환

 

그날 밤, 세 명의 뛰어난 구미호는, 위례의 산 정상에서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의 등 뒤로, 잿빛으로 침묵하는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다솜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들의 심장은 비어 있었다. 내가 치유할 상처가, 존재하지 않았다."

 

미류가 뒤를 이었다.

"그들의 머리는 텅 비어 있었다. 내가 들어갈 꿈의 문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가람이 무겁게 말했다.

"적은, 형체가 없었다. 내가 벨 목이, 존재하지 않았다."

 

세 명의 위대한 구미호는, 자신들의 생애 처음으로, 완벽한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이것은 그들이 아는 어떤 저주도, 어떤 악귀도 아니었다. 존재의 근원 자체가 시들어가는, 거대한 영혼의 역병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서진 자존심과 함께, 이 끔찍한 절망의 소식을 아란에게 전하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세 명의 뛰어난 구미호는 처음으로 자신들의 한계를 느끼며 여우구슬 골짜기로 돌아왔다. 그들을 맞이한 아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비장했다.

 

"이것은 하나의 탁기가 아니다. 도시가 뿜어내는 수백만의 공허와 체념이 모여 만들어진 '허무(虛無)의 바다'. 낚싯대 하나로는 바다의 모든 물고기를 잡을 수 없고, 칼 한 자루로는 파도를 벨 수 없으며, 배 한 척으로는 바다 전체를 품을 수 없다. 이제는 너희 셋의 힘을 하나로 엮어야 할 때다."

 

아란의 지휘 아래, 역사상 전무후무한 '영혼의 대수술'이 계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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