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장막의 결단, 영원한 이별
신계(神界)의 천상 회의장.
'용루의 홍수' 이후, 신계는 큰 혼란에 빠졌다.
옥좌에 앉은 옥황상제의 표정은 구름처럼 깊어, 그 속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그의 발치에서는, 용왕이 아들의 죽음을 통곡하며 인간 세상에 대한 징벌을 간청하고 있었고, 벽력장군은 당장이라도 번개를 내려 저 오만한 제사장을 재로 만들겠다며 노성을 터뜨렸다.
반면, 인간들의 밭을 돌보던 토지신(土地神)이나 아이들을 지켜보던 삼신할미(三神) 등은 섣부른 판단이라며 반대했다. 신계는 두 세력으로 나뉘어 팽팽하게 대립했다.
그때, 옥황상제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소란스러웠던 회의장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손바닥 위에 떠 있는, 둥글고 매끄러운 달빛 같은 거울 '천리감(千里鑑)'을 들어 보였다.
"모두 보시오. 저 아이의 영혼이, 지금 어느 길을 걷고 있는지를."
천리감의 표면이 물결치더니, 이내 인간 세상의 한 풍경을 비추기 시작했다.
처음 보인 것은, 수많은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추앙받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바로 태석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발치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고, 그를 '우리의 구원자'라 칭송했다.
하지만 천리감이 더 깊이, 그의 영혼의 본질을 비추기 시작하자, 신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천리감 속 태석의 주변에는, 평범한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의 위대한 대의와 지도자의 카리스마 뒤편으로, 검고 끈적끈적한 '오만의 탁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위를, '용루의 홍수' 때 죽어간 수많은 인간들의 원혼(怨魂)과, 그 원혼들이 변질된 흉측한 악귀(惡鬼)들이, 마치 불나방처럼 떼를 지어 맴돌고 있었다.
그들은 태석을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강력한 영기와 뒤틀린 욕망에 이끌려, 그를 자신들의 왕처럼 따르고 있었다. 태석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이끄는, 위태로운 왕국의 군주처럼 보였다.
같은 시각, '용루의 홍수'가 휩쓸고 간 남쪽의 땅.
태석은 자신이 만들어낸 폐허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공기 중에는 아직도 흙 비린내와, 시체가 썩는 역한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것은, 홍수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가족, 집, 그리고 삶의 희망까지도.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태석, 단 한 사람뿐이었다.
"대제사장님!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당신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사람들의 맹목적인 믿음과 절박한 눈빛은, 태석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작은 죄책감마저 지워버렸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는 대신, 그 실패의 원인을 나약한 신들과 변덕스러운 자연에게로 돌렸다.
'…그래. 이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강의 신과, 너무나도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한낱 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면 되는 것이다. 신의 변덕에도, 자연의 분노에도 굴하지 않는, 절대적인 힘을.'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젊은 용이 숨을 거두었던 바로 그 강가로 향했다. 그리고 명령했다.
"여기에 제단을 쌓아라.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가장 견고한 제단을!"
사람들은 그의 말에 따라, 홍수가 남긴 잔해들로 제단을 쌓기 시작했다. 부서진 집의 대들보, 흙탕물에 나뒹굴던 제기(祭器), 그리고 강의 신이었던 용의 시신에서 떨어져 나온, 빛을 잃은 비늘 조각까지도. 제단은, 그렇게 희생과 비극의 기억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제단이 완성되자, 태석은 그 꼭대기에 올라섰다. 그의 주변을, 여전히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돌던 홍수의 원혼들이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살아생전의 기억 때문에, 태석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속삭였다.
'춥습니다… 억울합니다…'
'우리를 구원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힘이… 더 큰 힘이 필요합니다…'
태석은 그들의 원한 서린 속삭임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그릇된 대의가 완성되고 있었다.
'너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 너희의 슬픔과 분노, 이 땅에 묶인 그 거대한 한(恨)을, 내가 모두 거두어들이겠다. 너희의 원한은, 인류를 위한 위대한 힘의 초석이 될 것이다. 이것은 너희의 영혼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장 신성한 구원의 의식이다!'
그는 자신을, 비극을 힘으로 바꾸는 위대한 연금술사라고 믿었다.
태석은 품속에서, 약한 영물들의 정기를 빼앗아 만들었던 검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는 단검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그었고, 흘러나온 피를 제단 위에 뿌리며, 금지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늘에 바치는 기도가 아니었다. 땅에 묶인 원혼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의 탁기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탐욕의 주문이었다.
그가 주문을 외우자, 제단 주변을 맴돌던 수백의 원혼과 악귀들이, 마치 거대한 검은 소용돌이처럼 제단을 향해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용돌이는 태석의 몸을 휘감았고, 그는 영혼이 찢기는 듯한 극심한 고통과 함께,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둡고 강력한 힘이 자신의 몸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과 희열이 뒤섞인, 기괴한 표정이 떠올랐다.
신계에서, 천리감을 통해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신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저놈이! 감히 죽은 자들의 원한을 자신의 힘으로 삼으려 하다니!"
"그는 더 이상 제사장이 아닙니다! 마도(魔道)에 빠진 괴물일 뿐입니다!"
옥황상제는 말없이 천리감을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체념이 서려 있었다. 그는 보았다. 인류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인류를 제외한 모든 것을 적으로 돌리고, 심지어 죽은 자의 영혼마저 도구로 삼으려는, 한 인간의 뒤틀린 사랑과 오만한 욕망을.
저 불길은, 이제 너무나도 커져 버렸다. 더 이상 인간 세상의 안에서 끌 수 있는 불이 아니었다. 이대로 둔다면, 저 불길은 결국 인간 세상을 모두 태우고, 신계마저 위협하게 될 것이다.
옥황상제는 마침내,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회의장 전체를 울릴 만큼 단호했다.
"…이제, 때가 되었다."
"두 세계를… 갈라놓을 때가."
옥황상제의 결단은 단호했다.
그는 인간계와 신계 사이에 누구도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막(帳幕)'을 치겠다고 선언했다.
더 이상 신과 영물이 인간의 삶에 직접 관여할 수 없게 하고, 인간 역시 신계의 힘을 함부로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회의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영원한 이별의 선언이었다.
옥황상제의 마지막 선언 이후, 사흘간 세상에는 '신들의 눈물'이라 불리는 이슬비가 내렸다.
그것은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수천 년간 인간의 삶에 녹아들어 있던 신과 영물들은, 자신들이 사랑했던 필멸의 존재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강가 마을의 늙은 어부는, 평생의 풍어를 빌었던 강나루에 막걸리 한 동이를 부었다. 그러자 강물의 신(神)이, 이제는 희미해진 용의 형상으로 물안개 속에서 나타났다.
"그동안 고마웠네, 인간 친구여.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대들의 그물을 채워줄 수도, 성난 물길을 막아줄 수도 없게 되었네. 부디… 내 힘이 없더라도, 지혜롭게 물길을 다스리며 살아가시게."
어부는 눈물을 흘리며, 강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산골 마을의 아이들은, 늘 함께 숨바꼭질을 하던 숲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이 "목매야, 나와라!" 하고 외치자, 나무의 정령들이 나뭇잎과 이슬로 빚은 듯한 투명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얘들아, 이제 우린 너희와 놀아줄 수 없단다. 대신 이 꽃을 줄게. 우리가 함께 놀았던 기억이 담겨 있단다."
정령들은 아이들의 손에, 빛을 머금은 작은 꽃송이들을 쥐여주고는, 숲의 이슬처럼 서서히 사라져갔다.
아이들은 다시는 빛나지 않을 꽃을 끌어안고,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집집마다 부엌을 지키던 조왕신, 장독대를 돌보던 철륭신, 집터를 지키던 터주신. 수많은 가정의 신들 역시, 자신들이 평생을 지켜온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영적으로 민감한 노인들은 장독을 어루만지고, 부엌을 쓸고 닦으며, 보이지 않는 오랜 친구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세상 전체가, 거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다.
그 모든 이별 중 가장 애틋한 것은, 여우구슬 골짜기에서 이루어졌다.
아란은 자신을 엄마처럼 따르던 인간 아이, 솔이의 작은 손을 잡고 있었다.
"솔이야… 이제 정말 가야 할 시간이란다."
아란의 목소리는 슬픔으로 잠겨 있었다. 솔이는 아란의 다리를 붙잡고, 고개를 저으며 울부짖었다.
"싫어! 아란님, 가지 마세요! 솔이가 더 착한 아이가 될게요! 밥도 잘 먹고, 울지도 않을게요! 제발… 솔이 버리고 가지 마세요…."
아란은 그런 솔이를 끌어안고, 자신의 아홉 꼬리 중 가장 부드럽고 따스한 은빛 꼬리털을 한 움큼 뽑아, 작은 비단 주머니를 만들었다.
"이 주머니를 간직하렴, 아가. 네가 무섭거나 외로울 때, 이 주머니를 만지면 나의 온기가 느껴질 게다. 나는 저 장막 너머에서, 언제나 너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야. 너의 기쁨도, 너의 슬픔도, 바람에 실려오는 너의 모든 메아리를 듣고 있을 게다."
바로 그때였다.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거대하고 투명한 막(帳幕)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막이 아니었다. 마치 달빛과 별빛을 함께 녹여 짠 비단처럼, 영롱하고 성스러운 빛을 내뿜는 거대한 커튼이었다.
장막은 소리 없이, 그러나 그 무엇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의지를 가지고 내려왔다.
장막이 땅에 닿는 곳마다, 세상의 '색깔'이 변했다. 총천연색의 생명력으로 빛나던 세상은, 채도가 한 단계 낮아진 듯 차분하고 현실적인 색으로 바뀌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던 신비로운 기운, 즉 영기(靈氣)가 사라져갔다.
강의 신, 숲의 정령, 온갖 영물들의 모습이, 마치 물에 번지는 수채화처럼 희미해지다가, 이내 공기 속으로 완전히 스며들어 사라졌다.
아란은 솔이의 이마에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었다.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감추기 위해, 그녀는 뒤돌아 여우구슬 골짜기 깊은 곳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아홉 개의 은빛 꼬리가, 마치 슬픈 붓질처럼 허공에 마지막 궤적을 그리며 사라져갔다.
그녀의 꼬리가 아이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솔이는 목 놓아 울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울음소리는, 이제 아무런 메아리도 되돌려주지 않는, 고요하고 적막해진 세상 속에 공허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같은 시각, 서라벌의 가장 높은 산 정상의 천문대에서, 태석은 그 모든 광경을 홀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장막이 온 세상을 뒤덮으며, 그가 알던 세계를 전혀 다른 곳으로 바꾸어놓는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는 보았다.
세상을 연결하던 수십억 개의 영적인 실타래들이, 장막에 닿는 순간 '툭, 툭' 소리를 내며 끊어지는 것을.
숲과 강, 바위와 인간을 잇던 교감의 길이 사라지는 것을.
세상의 모든 신비가, 거대한 장막 뒤편으로 유배되는 것을.
장막이 완전히 드리워지자, 세상은 고요해졌다.
더 이상 숲에서 목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강의 신은 그 모습을 감추었다.
인간들은 영물과 신들의 존재를 빠르게 잊어갔고,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할머니의 옛이야기, 전설 속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다.
'…해냈다.'
태석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인간은 안전하다. 신들의 변덕에, 영물들의 강대한 힘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 오롯이 우리 인간의 힘과 의지만으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피어오르려는 순간, 그는 보았다. 아란을 잃고 홀로 주저앉아 우는 솔이의 모습을. 강의 신이 떠난 강가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늙은 어부의 모습을. 정령들이 사라진 숲에서, 빛을 잃은 꽃을 들고 슬퍼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는 인간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인간을 세상의 모든 신비와 경이로움으로부터 '고립'시킨 셈이 되었다. 그는 인간을 위한 힘을 원했지만, 그 결과로 인간은 가장 위대한 친구들을 모두 잃고,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종족이 되어 버렸다.
그는 장막이 쳐진, 텅 비고 침묵하는 하늘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웃음소리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인간을 위한 왕국을 세웠다고 믿었지만, 그가 만든 것은 결국 거대한 감옥에 불과했다.
그는 그날 이후, 자신이 얻은 모든 힘과 지식을, 후세에 이 비극을 알리고 경고하기 위한 기록을 남기는 데 쏟아부었다. 그것이, 자신이 저지른 돌이킬 수 없는 과오에 대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다. 그는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한때는 세상을 구원하려 했던 영웅이자, 결국에는 세상을 고독하게 만든 장본인으로서.
신계로 돌아간 아란은 옥황상제를 찾아가 마지막 간청을 올렸다.
"폐하,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언젠가 인간계의 탁기가 극에 달하여 스스로를 파멸시킬 지경에 이르고, 장막의 힘이 약해지는 날이 온다면… 저의 후손 중 하나가 그 땅에 다시 태어나, 그들의 영혼을 정화할 기회를 주십시오. 한때 세상을 돌보던 '영혼의 정원사'의 마지막 책무를 다하게 해주십시오."
옥황상제는 아란의 황금빛 눈동자에 담긴 깊은 사랑과 슬픔을 보며,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아주 먼 훗날을 향한, 슬프고도 희미한 희망의 약속이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서울의 한 작은 북카페에서 마침내 싹을 틔우게 될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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