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여우의 비가(悲歌): 태석과 구미호, 그리고 모각
조화의 황금기, 그리고 그림자의 싹
'무감의 안개' 사건 이후, 인간과 구미호 일족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깊어졌다. 특히 신라의 수도 서라벌(徐羅伐)은 그 조화의 결정체와 같은 도시였다. 도시를 설계한 이는 당대 최고의 제사장(祭司長)이자 천재적인 학자였던 태석(泰碩). 그는 젊은 시절부터 여우구슬 골짜기를 드나들며 아란의 지혜를 배웠고, 다솜, 미류, 가람과는 형제처럼 지냈다.
"다솜님, 이 터에 시장을 세우려 하니, 땅의 정령들이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부디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시오."
태석이 청하면, 다솜은 땅의 슬픔에 공명하여 그 기운을 달랬고, 그 자리에 세워진 시장은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미류님, 왕께서 새로운 궁을 짓고자 하시나, 그 구조가 백성의 원망을 살까 두려워하십니다. 부디 꿈을 통해 백성들이 진정 원하는 궁의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미류는 서라벌 백성들의 집단 무의식에 들어가, 그들이 원하는 '소통하는 궁궐'의 이미지를 길어 올렸고, 태석은 이를 바탕으로 모든 문이 백성을 향해 열린 궁을 설계했다.
도시 외곽의 방어는 가람의 몫이었다. 그는 외부에서 흘러드는 악한 기운이나 요물들을 그림자처럼 처리했고, 덕분에 서라벌은 단 한 번도 외침(外侵)에 시달리지 않았다.
인간들은 구미호를 신(神)처럼 떠받들었다. 아이들은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 인형을 품에 안고 잠들었고, 구미호의 이야기는 가장 지혜롭고 자비로운 신화로 아이들에게 전해졌다. 태석은 인간과 구미호의 조화를 상징하는 살아있는 증거였고, 그의 권위는 왕을 넘어설 정도였다.
하지만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 태석의 그늘에 가려진 2인자, 주술사 모각(茅閣)은 이 조화가 못마땅했다. 그는 본디 인간의 힘만을 숭상하는 배타적인 인물이었다.
* * *
그림자의 탄생: 주술사 모각의 비극
태석이 서라벌의 햇살 아래에서, 영물들과의 교감을 통해 명성을 쌓아가고 있을 때, 모각은 춥고 척박한 북방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그 지역의 험준한 '바람 칼날 산'을 지배하는 변덕스러운 산신(山神)을 모시는, 이름 없는 촌무(村巫) 집안이었다.
어린 시절의 모각은, 태석만큼이나 영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그는 바람의 소리를 듣고, 바위의 숨결을 느끼며 자랐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매년 정성스럽게 제물을 바치고 산신의 비위를 맞추며, 마을의 안녕을 비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 믿었다. 그는 그것이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아가는 '조화'라고 배웠다.
하지만 그가 믿었던 조화는, 아주 어리고 약한 존재였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었다. 마을에는 역병이 돌았고, 모각이 애지중지하던 여동생 '서리'가 그만 역병에 걸리고 말았다. 백약이 무효했다.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갔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의원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제 하늘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요. 다만, 전설에 따르면 저 바람 칼날 산 정상,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만병을 고치는 '서리꽃(霜花)'이 핀다고는 합니다만…."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산 정상은 산신의 성역(聖域). 인간이 함부로 발을 들였다가는 산 채로 갈가리 찢겨 죽는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하지만 딸의 희미한 숨소리 앞에서, 아버지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모각의 아버지는 집안의 마지막 남은 곡식과, 아내가 가장 아끼던 비녀까지 꺼내 제물을 준비했다. 그리고 어린 모각의 손을 잡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 칼날 산을 올랐다.
산 중턱의, 산신에게 바치는 제단 앞에서,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이마가 깨져라 머리를 찧으며 애원했다.
"위대하신 산신이시여! 평생을 당신께 정성을 다해온 미천한 종의 간청을 부디 외면하지 마옵소서! 제 어린 딸이 죽어가나이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정상의 서리꽃 한 송이만이라도 캘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제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치겠나이다!"
그때였다. 주변의 모든 눈보라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그리고 산 전체가 울리는 듯한, 바위와 얼음이 서로 긁히는 듯한, 인간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그들의 영혼에 직접 울려 퍼졌다.
[…어리석은 필멸자로다.]
목소리에는 자비도, 분노도 없었다. 오직, 수만 년의 세월을 살아온 존재의, 벌레를 내려다보는 듯한 차가운 무심함만이 담겨 있었다.
[너희의 생(生)과 사(死)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의 딸은 오늘내일하는 하루살이 목숨. 나는 만 년을 이곳에 서 있었고, 앞으로도 만 년을 더 서 있을 바위다. 너희의 슬픔은, 바위를 스치는 바람 한 줄기보다도 무가치하다. 그 하찮은 제물로, 나의 것을 탐하려 들지 마라. 썩 물러가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단 위의 바위 하나가 무너져 내렸다. 신의 경고였다.
모각의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넋을 잃고 주저앉았다. 평생을 바친 믿음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부정당한 것이다. 어린 모각은, 그 모든 것을 뜬눈으로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흘리는 피눈물과, 신의 압도적인 무관심을.
그날 밤, 그들은 빈손으로 마을에 돌아왔고, 여동생 서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여동생의 작은 무덤 앞에서, 모각은 울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 대신, 차갑고 단단한 결의가 빛나고 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인간과 영물의 관계는 '조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예속'이었다. 인간은, 변덕스러운 신들의 발치 아래에서 자비를 구걸하는 노예나 가축에 불과했다. 그들의 슬픔은 무시당하고, 그들의 생명은 하찮게 여겨질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여동생을 죽인 것이 역병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약한 믿음과, 그 믿음을 비웃은 신의 오만함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는 무덤 앞에, 자신의 영혼을 걸고 맹세했다.
'두 번 다시는, 바위나 나무 따위에 고개 숙이지 않겠다. 두 번 다시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자비에 내 가족의 목숨을 맡기지 않겠다.'
'그들에게 힘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의지가 있다. 나는 이제부터 신에게 비는 법이 아닌, 인간의 의지로 신에게 맞서는 법을 배울 것이다. 오직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힘을 갈고닦아, 다시는 그 어떤 변덕스러운 존재도 우리를 하찮게 여기지 못하게 만들겠다.'
그날 이후, 모각은 고향을 떠났다. 그는 영물과 교감하는 태석의 방식이, 결국 자신의 아버지가 걸었던 길과 다르지 않다고 믿었다. 그것은 화려하고 고상해 보이지만, 결국에는 타인의 힘에 의존하는 나약한 길일 뿐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신화와 전설을, '교감'의 대상이 아닌 '분석'의 대상으로 연구했다. 그는 신과 영물들의 약점을 파헤치고, 인간의 정신력을 극대화하여 그들을 속박하고, 봉인하고, 퇴치하는,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주술 체계를 만들어나갔다.
그에게 있어, 구미호는 지혜로운 스승이 아니었다. 언젠가 인간이 극복하고 뛰어넘어야 할, 강력하지만 위험한 '이물(異物)'일 뿐이었다.
훗날, 서라벌에서 태석과 재회했을 때, 그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태석을 본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저 위험하고 헛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어리석은 이상주의자'를 보는, 깊은 연민과 경계심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 * *
"제사장님, 언제까지 저 짐승들의 힘에 의지하실 겁니까?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저들은 언젠가 변심하여 우리를 해할지 모르는 이물(異物)일 뿐입니다."
"모각, 그대의 눈은 너무 편협하군. 구미호 일족은 우리의 스승이자 벗이다. 그들을 의심하는 것은 스스로의 그림자를 보고 놀라는 것과 같으니."
태석은 모각의 충고를 일축했지만, '인간의 힘으로'라는 말은 그의 마음 한구석에 작은 가시처럼 박혔다. 그는 구미호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들의 압도적인 힘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그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홍빛 광기(狂氣), 최초의 균열
황금기는 영원하지 않았다. 재앙은 서역에서부터 불어온 교역선에 실려 온, 보이지 않는 포자(胞子)와 함께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진홍빛 역병(眞紅疫病)'이라 불렀다.
이 병은 '무감의 안개'처럼 감정을 지우지 않았다. 오히려, 감정을 폭주시키고 뒤틀어, 영혼 그 자체를 썩게 만드는 끔찍한 병이었다.
첫 번째 단계는 아주 작은 육체적 징후로 시작되었다. 감염된 사람의 가슴 부근에, 바늘로 찌른 듯한 작은 진홍색 반점(斑點)이 나타났다. 반점은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두 번째 단계에서, 영혼의 부패가 시작되었다. 역병의 포자는, 한 사람이 가진 가장 강렬한 감정 하나를 숙주로 삼아 기생했다. 그리고 그 감정을, 흉측하고 괴물 같은 집착으로 변질시켰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愛)'은, 아이를 방에 가두고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하는 질식할 듯한 '소유욕'으로 변했다.
이웃을 아끼던 농부의 '정(情)'은, 자신의 밭 경계선을 한 뼘이라도 침범하면 낫을 들고 달려드는 맹렬한 '적개심'으로 변했다.
학자의 '열정(熱情)'은, 자신보다 뛰어난 동료를 모함하고 그의 책을 불태우는 시기심 가득한 '광기(狂氣)'로 뒤틀렸다.
사람들은 감정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단 하나의 감정에 모든 것을 지배당하여, 가장 순수했던 감정이 가장 끔찍한 무기가 되어 서로를 할퀴고 파괴하기 시작했다. 서라벌은 조용한 무덤이 아닌, 시끄러운 지옥으로 변해갔다.
마지막 단계는 육체의 소멸이었다. 자신의 뒤틀린 감정의 불꽃에 영혼이 완전히 타버린 사람은, 가슴의 진홍색 반점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며, 격렬한 경련과 함께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태석은 가장 먼저 구미호 일족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결과는 이전보다 더욱 참혹한 절망이었다.
다솜은 병자들의 마음을 읽고 치유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의 꼬리'가 뒤틀린 소유욕에 닿는 순간, 그의 순수한 치유의 힘은 오히려 그 소유욕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만드는 '연료'가 되어버렸다.
그의 힘은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병을 키우는 독이 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치유 능력이 누군가를 해칠 수도 있다는 끔찍한 사실과 마주했다.
미류는 그들의 꿈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은 텅 빈 암흑이 아니었다. 뒤틀린 단 하나의 감정이 만들어낸, 영원히 반복되는 열병 같은 악몽의 소용돌이였다.
아들을 가둔 어머니의 꿈은, 아들이라는 이름의 새를 새장에 가둔 채 영원히 지켜보는 감옥이었고, 학자의 꿈은 경쟁자들의 책이 불타는 도서관의 모습이 무한히 반복되는 지옥도였다. 그곳에는 어떤 이성도, 어떤 새로운 욕망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가람은 베어야 할 악귀를 찾으려 했지만, 적은 외부에 있지 않았다. 이 역병은 영혼에 기생하는 '바이러스'와도 같아서, 적은 바로 병자 자신이었다. 그가 벨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구미호 일족 역사상 처음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힘이 완벽하게 '무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서 처절하게 좌절했다.
아란은 비통한 표정으로 태석에게 고백했다.
"미안하네, 태석. 이 역병은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네. 이것은 영혼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영혼 그 자체를 뒤틀고 썩게 만드는, 살아있는 독(毒)과 같아. 우리의 치유는 오히려 독의 먹이가 되고, 우리의 지혜는 광기 속에서 길을 잃는구나."
태석, 절망의 심연에 갇히다
태석의 눈은 흔들렸다. 매일같이 수백 명의 백성이, 자신의 가장 아름다웠던 감정 때문에 미쳐가다 죽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극은, 마침내 그의 집 안까지 덮쳐왔다.
그의 아내는, 태석을 향한 사랑이 뒤틀린 나머지, 그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막아서는 의부증 환자가 되어 있었다. 아들 솔지는, 아버지를 향한 존경심이 뒤틀려,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밤을 새워 글공부를 하다가 코피를 쏟고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살아있는 지옥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의 귀에, 모각의 목소리가 악마의 속삭임처럼 맴돌았다. '보십시오, 제사장님! 저들의 힘은 불완전합니다! 오히려 저주를 부추길 뿐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인간의 강한 감정을 시험하고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는 저들의 음모일지도 모릅니다!'
절망은 이성을 마비시켰다. 사랑은 의심으로 변질되었다. 태석은 자신을 광적으로 감시하는 아내와, 스스로를 학대하는 아들을 보며, 아란의 황금빛 눈동자를 떠올렸다.
'무감의 안개'가 서라벌을 덮쳤을 때, 나는 그들을 의지했다.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들의 힘에 기댔기에 우리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그들의 힘은 독이 되었다. 다솜의 치유는 불길을 거세게 만들었고 , 미류의 꿈은 악몽의 소용돌이가 되었다. 가람의 칼은 적의 실체조차 베지 못한다.
아란은 말했다. "이 역병은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네." 그녀의 목소리는 비통했지만, 태석의 귀에는 냉정한 포기처럼 들렸다. '그렇다면, 이 모든 비극을 그저 지켜보란 말인가? 나의 백성들이, 나의 가족들이 고통 속에 죽어가는 것을, 그저 자연의 섭리라며 받아들이란 말인가!'
그는 홀로 궁궐의 가장 깊은 전각에 틀어박혔다. 며칠 밤낮을 뜬눈으로 새며, 태석은 자신이 썼던 모든 주술서와, 아란에게 배웠던 구미호의 지혜를 되짚었다. 그는 무감의 안개 속에서 자신의 힘이 무력했던 순간을, 그리고 용루의 홍수 속에서 힘을 얻었던 순간을 번갈아 떠올렸다.
'빌리는 힘은 결국 내 힘이 아니다.' 과거의 무력감을 상기시키던 아란의 충고는, 이제 태석의 귀에 '인간은 너희의 것이 아니니, 오직 우리에게만 의지하라'는 오만방자한 경고로 변질되어 들려왔다.
그의 손이 무심코 책상 위의 붓을 쥐었다. 하얗고 깨끗한 종이 위에, 그의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단어들이 거칠게 휘갈겨졌다. ‘위선의 거울(僞善鏡)’, ‘파몽의 쇠사슬(破夢鎖)’, ‘침묵의 부적(沈默符)’...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신의 영역에 도전하겠다는, 지독하고 위험한 결의의 기록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심어진 의심의 씨앗은, 백성들의 통곡과 가족의 비극을 자양분 삼아, 순식간에 거대한 증오의 나무로 자라났다. 태석의 눈은 더 이상 아란의 지혜를 구하는 눈이 아니었다. 이성을 잃고 쓰러져가는 백성과 가족의 모습, 그리고 그 고통을 방관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미호 일족의 모습이 그의 눈을 가득 채웠다.
'저 눈동자 깊은 곳에,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진짜 힘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째서... 어째서 우리를 이 광기 속에 내버려두시는가.'
결국 태석은 변했다. 그는 더 이상 구미호의 친구가 아니었다. 자신의 믿음을 배신당하고, 오만함과 절망의 심연에 갇힌 채, 복수와 오직 인간을 위한 구원이라는 그릇된 대의에 사로잡힌, 한 명의 추악한 혁명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구미호 일족과 함께했던 모든 지식을, 그들을 파멸시킬 비수(匕首)로 벼리기 시작했다.
감정에 공명하는 다솜을 겨냥해, 그는 상반된 감정을 뒤섞어 영혼을 혼란시키는 '위선의 거울(僞善鏡)'을 만들었다.
꿈을 다루는 미류를 봉쇄하기 위해, 꿈의 길목을 차단하고 악몽에 가두는 '파몽의 쇠사슬(破夢鎖)'을 고안했다.
강력한 기운을 지닌 가람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영적인 기운을 흡수하고 흩어버리는 흑요석으로 만든 '침묵의 부적(沈默符)'을 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날.
태석은 '역병을 몰아낼 마지막 대규모 정화 의식'을 거행한다며, 구미호 일족 전체를 여우구슬 골짜기 아래 넓은 평원으로 초대했다. 아란과 구미호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
의식이 시작되고, 아란이 정화를 위해 눈을 감은 순간. 태석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피를 토하듯 외쳤다!
"인간의 적, 구미호를 벌하라! 여우 사냥을 시작한다!"
신호와 함께, 평원을 둘러싼 산등성이에서 수만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갑옷에는 '침묵의 부적'이 달려 있었고, 손에는 '위선의 거울'과 '파몽의 쇠사슬'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하고 비열한 배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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